
서울에서 김포시를 지나 초지대교나 강화대교를 건너면 강화도라는 섬이 있어요.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며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죠.
그래서 강화도에는 고인돌 유적을 비롯해, 단군 할아버지가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는 마니산 참성단, 고려 때의 궁궐터 등 수많은 문화재가 널려 있답니다. 뿐만 아니라 강화도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도 무척 많았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팔만대장경도 강화도에서 만들어져 해인사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와 문화의 고장으로 잘 알려진 강화도에는 유명한 절들도 많이 있어요. 그 중 가장 손꼽히는 절은 전등사랍니다.
전등사는 서기 381년에 창건된 절입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와 나라의 종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서기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전해진 지 9년만인 서기 381년, 강화도에 전등사라는 절이 세워졌으니 전등사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전등사를 세운 분은 ‘아도’라는 이름을 가진 스님이었습니다. 아도 스님은 본래 중국에서 태어나 불교를 전하기 위해 우리나라로 건너와서 많은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경상북도 구미시에는 아도 화상을 높이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워놓았습니다.
처음 아도 화상이 전등사를 세웠을 때는 ‘진종사’라 불렸습니다. 그 뒤 진종사가 전등사로 불려진 것은 고려 때의 일입니다. 고려 충렬왕의 왕비인 정화궁주가 전등사에 옥으로 만든 등잔을 건네주면서 전등사라고 부르게 되었대요. 여기에서 ‘전등’이라는 말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등불처럼 전한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화궁주가 중국에서 수많은 경전을 들여와 전등사에 전했기 때문에 전등사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보는 게 옳지요.
몽골군의 침략을 받은 고려 왕실에서는 39년 동안 강화도로 궁궐을 옮긴 적이 있어요. 이때 전등사는 부처님 말씀으로 고려 왕실은 물론 나라를 구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등사에는 고려 때 임금이 머물던 가궐(임시 궁궐)터가 남아 있지요.


전등사는 조선시대에도 매우 중요한 절로 손꼽혔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등사 경내에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중요한 문서들을 보관했기 때문입니다.
전등사가 자리 잡은 정족산은 예로부터 명당으로 손꼽혔대요. 그래서 조선왕실에서는 전등사에 사고(나라의 역사책과 귀중한 문헌을 보관하는 건물)를 짓게 하고 <조선왕조실록> 등 귀중한 문화재를 보관하게 했던 것이죠.
이 덕분에 전등사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국보로 지정되었답니다.
전등사는 조선 말기에도 나라를 구했던 절로 유명했습니다.
고종 임금 때인 1866년에 프랑스가 여러 척의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쳐들어왔습니다. 강화도가 배를 이용해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은 프랑스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워 마침내 신식 무기를 갖춘 프랑스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두 나라 군사들이 전투를 벌였던 곳이 바로 전등사를 에워싼 삼랑성(정족산성)이었어요. 이때 조선 군사들은 나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게 해달라며 부처님께 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안에는 이 병인양요 때 군사들이 써놓은 이름들이 남아있답니다.


이처럼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데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전등사에는 대웅보전을 비롯해 수많은 보물급 문화재가 남아있으며 강화도를 찾는 사람들은 반드시 한번씩 이 절을 찾아 마음을 가다듬고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보고 있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