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 경내 전경
   
 

강화도 전등사(傳燈寺)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묵호자 아도화상(墨胡子 阿道和尙)이 창건했다고 하는 진종사(眞宗寺)가 기원이다. 그러나 한국 불교는 소수림왕 2년(372) 중국 전진(前秦)의 부견이 처음 전해주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인데, 이 시기에 고구려 승려가 적국인 백제 영토인 강화도에 사찰을 세웠다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고, 누군가가 전등사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지어낸 말 같다. 진종사가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충렬왕 8년(1282) 몽골출신인 왕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승려 인기(印奇)를 통하여 송나라에서 간행된 대장경과 옥등(玉燈)을 시주하면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기록인데, 전등이란 ‘불법을 등불로 밝힌다’는 의미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항전하며 강화도로 천도했다가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환도한 직후 정화궁주의 원찰이 된 전등사는 이후 충숙왕, 충혜왕, 충정왕 등 역대 고려 조정의 각별한 보호를 받았다. 전등사가 있는 길상산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는 삼랑성(三郎城: 사적 제130호)이 있는데, 삼랑성은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또, 몽골의 고려침입 때 고려의 궁궐터가 있으며, 조선 고종 3년(1866) 병인년에 프랑스 신부 처형을 구실로 강화도를 무단 점령했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전지였던 전등사에서는 매년 개천절을 맞아 1주일 동안 호국영령을 위한 영산대재와 함께 문화축제를 벌인다.

 

   
전등사 남문 입구
   
남문(종해루)

전등사는 김포에서 국도 48번 도로를 따라 강화대교를 건넌 강화읍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22㎞ 떨어져 있다. 서울 이남에서는 올림픽도로나 수도권 외곽도로로 김포나들목을 빠져나간 뒤 양촌사거리에서 2002년 8월 개통한 초지대교를 건너면 지척인데, 대중교통은 신촌·영등포·김포 등지에서 강화행 시외버스가 있다. 서울지하철 2호선 신촌역 4번 출구를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M6117번 급행버스를 타고 김포복합환승센터에서 60-2번으로 환승 후, 길상면 온수리에서 내리면 된다(2015.09.30. 강화도 마니산 참조). 조계종 본사 조계사의 말사인 전등사는 동문과 남문의 두 곳에서 들어갈 수 있는데,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어린이 1000원, 주차비는 2000원이다. 동문은 대문이 없이 휑한 성벽을 지나는 곳이고, 남문은 매표소 앞에서 울창한 소나무숲길을 지나면 아치형 성문 종해루(宗海樓)가 일주문 역할을 한다. 전형적인 산지가람인 경내는 완만한 경사이고,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해탈문~ 대웅전의 배치구조가 아니라 대웅보전(보물 제178호)과 향로전, 약사전(보물 제179호), 명부전이 나란히 한 줄로 있고, 범종각 옆에 종무소로 사용하는 적묵당이 있다. 전등사의 상징인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에서 직진하여 템플스테이를 지나면 이곳에 이르게 되어 종무소 앞이 경내의 중심이 된다.

 

   
삼랑성(정족산성)
   
템플스테이 요사채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 가파른 계단 위에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린 누각 밑을 지나면 누각에 대조루(對潮樓)라는 편액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대조루가 전등사의 해달문 역할을 하는데, 정면 3칸·측면 3칸인 대웅보전은 조선 광해군 13년(1621) 중건되었다.

단청을 하지 않아서 한층 더 고상하게 보이는 대웅보전에는 광해군 15년(1623) 수연(守衍) 스님이 조각한 목조 석가여래삼존불상(보물 제1785호)과 후불탱화, 그리고 중종 38년(1544) 정수사(淨水寺)에서 조각한 목판 법화경 104매가 있다(인천시유형문화제 제45호). 대웅전에서는 추녀 네 귀퉁이에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상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전해오는 이야기는 대웅전 중창공사를 하던 광해군 때 목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막의 주모와 연인이 되어 품삯으로 받은 돈을 모두 주모에게 맡겨두었으나 주모가 그 돈을 갖고 도망갔다고 한다. 화가 난 목수는 벌거벗은 주모상을 조각해서 평생 지붕이나 떠받고 살도록 저주했다고 하지만, 부처님을 모신 경건한 대웅전에 불손하게 여인의 나체상을 새길 수 있었을지 의문일 뿐만 아니라 그 모습이 어쩐지 잡귀를 쫓는 원숭이 같다.

 

   
명부전

명부전 앞에 있는 범종각의 범종(보물 제393호)은 북송의 철종소성(哲宗紹聖) 4년 허난성 회경부 수무현에 있는 백암산 숭명사(崇明寺) 종이라는 명문이 있는 중국종이다. 북송의 철종연간은 고려 숙종 2년(1097년)에 해당하는데, 혹시라도 충렬왕의 왕비 정화공주가 대장경과 옥등을 전등사에 시주할 때 함께 시주한 것이 아닐까 싶다. 범종은 일제강점기에 군수물자 공출로 빼앗겼는데, 해방 후 부평의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전등사로 돌아온 사연이 있다. 왼편 산기슭에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자 고종 46년(1259) 급작스럽게 지은 고려의 가궐(假闕)터인데, 가궐 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정족산 사고 외삼문
   
대조루

대웅전 뒤로 난 산길을 올라가면 삼성각이고, 그 위에 정족산 사고(史庫)가 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안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4곳에 보관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 이외에 모두 소실되자 전주사고본을 기준하여 재간행했다. 전주사고본은 마니산으로, 실록 4부는 강원도 오대산, 경상도 태백산, 평안도 묘향산 등에 각각 보관시켰는데, 1678년(숙종 4)은 마니산에서 보관하던 실록을 전등사로 옮기면서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譜閣)도 지었다. 그 정족산 사고가 대웅전 뒤에 있다. 1719년(숙종 46) 조정에서는 전등사의 가장 큰 스님에게 도총섭이라는 지위를 주었는데, 도총섭은 왕실의 실록과 문서를 보관하는 임무를 겸하는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이었다. 1726년(영조 3) 영조가 직접 전등사에 와서 ‘취향당’ 편액을 하사했으며, 1749년(영조 26)에는 대대적인 중창불사도 했다. 1909년 전등사에 보존하고 있던 실록과 왕실의 족보 등을 서울로 옮겨가면서 종무소 왼편에 사고와 선원보각 터를 알리는 표지판을 세웠다.

 

   
대웅보전

고종 3년(1866) 10월 프랑스가 베르느 신부 등 9명을 처형한 것을 구실로 강화도를 무단 점령했을 때, 전등사는 조선군이 프랑스군과 싸워서 승리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로즈(Roze) 제독이 군함 7척에 해군 1200여 명을 태우고 강화도를 점령하자, 조정에서는 별동부대인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고 제주목사 양헌수(梁憲洙)를 총책임자인 천송(千摠)으로 임명했다. 양헌수 장군은 강계포수 370여 명과 병사 100여 명 등 549명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10월 18일 밤 프랑스군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물살이 가장 거센 김포 덕포진에서 강화도 덕진진을 건넜다. 조선군의 상륙소식을 들은 로즈 제독은 올리비에(Olivier) 대령에게 병사 160여 명을 주고 정족산성의 공격을 명령하자, 11월13일 프랑스군은 주둔하던 갑곶진에서 노새에 도시락을 싣고 정족산성까지 약 18㎞를 행군했다. 정오 무렵 성 아래에 도착한 병사들은 점심을 먹고 싸우자고 했지만, 조선군을 얕잡아본 올리비에 대령은 성을 점령한 뒤에 점심을 먹자며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때 매복하고 있던 조선군에게 6명이 전사하고 60여명이 부상을 입자, 프랑스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1시간 만에 퇴각했다. 총소리에 놀란 노새들이 달아나서 프랑스군은 점심도 굶은 채 갑곶 진으로 되돌아간, 뒤 강화도 점령 40일 만인 12월17일 철수했다.

 

   
대웅전 나녀상 조각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있던 은괴 19상자와 수천 권의 문서를 약탈한 뒤 불을 질렀지만, 정족산사고의 실록과 왕실 족보 등은 온전했다. 한말 외국군과 싸워서 최초로 승리한 양헌수 장군은 그 공으로 한성우윤(右尹)이 되었으며, 천총 임명을 받은 10월11일부터 12월 2일까지 52일간을 기록한 병인일기(丙寅日記)에 남아있다. 정족산성 동문에는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있다. 200자×18.7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