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스님 3월 초하루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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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2,742회 작성일 19-04-07 12:00본문
주지스님 3월 초하루 법문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전등사 주변에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오늘은 다른 날 보다 신도님들이 덜 오신 것 같네요. 다들 봄나들이를 가신 것 같습니다.
절처봉생(絶處逢生)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절처봉생이란 말은 ‘끊어질 절’에 ‘곳 처’ ‘만날 봉’ ‘날 생’으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완전히 끊어진 자리에서 새로 만난다. 또는 새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절처봉생! 다들 따라서 한 번 해보세요. 절! 처! 봉! 생!... 이것은 우주 변화의 원리에서 또 우리 인생의 연기(緣起) 속에서의 말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병들고 죽고 묘지 속에 들어갑니다. 묘지에 들어가서 어느 정도까지는 자손들한테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그것을 풍수에서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고 합니다. 묘를 써서 탈골이 다 되면 뼈가 땅의 기운을 받아 더 무거워지고 윤택해지고 누렇게 변한다고 합니다. 그 뼈에 있는 에너지가 자손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와 같아서 좋은 묘를 쓰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간도 다 끝나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것을 절처봉생이라고 합니다. 우리 하루는 24시간이죠? 하루 24시간 동안에도 절초봉생을 합니다. 하루 24시간 동안에 어떻게 절초봉생이 이루어지죠? 깊이 잠 들었을 때는 내가 어느 곳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깨어나면서 나를 만납니다. 그게 절초봉생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많이 봅니다.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집에 숟가락조차 없을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사업에 재기하는 것도 절초봉생입니다. 사막에서 목이 엄청 말라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르다가 오아시스를 만나서 살아나는 것도 절초봉생이죠. 어머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가 황망하고 앞이 깜깜하고 두렵고 무서워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어떤 사람이 어머니에게 안내해 주거나 엄마가 나타나는 것도 절초봉생이죠. 절초봉생을 수행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허망한 생각들을 다 놓아 번뇌를 떨쳐내어 진리 속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절초봉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초봉생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게 새겨 놓기를 바랍니다.
또,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졸탁동시라고도 합니다. 이 말은 21일 동안 어미 닭이 따뜻한 품안에서 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정성스레 보살피면 병아리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자란 병아리는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합니다. 이때, 병아리가 안에서 알을 쪼는 것을 ‘줄’ 또는 ‘졸’아라 하고 어미가 여기에 맞춰 밖에서 쪼는 것을 ‘탁’이라고 합니다. 병아리와 엄마 닭이 함께 쫄 때 병아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을 줄탁동시 라고 합니다. 이 세상이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들이 임신을 하여 낳을 때가 되면 엄마와 태아가 모두 안다고 합니다. 엄마가 아는 것을 산기를 느낀다고 하죠. 우리들은 세상의 이치나 순리, 사리를 본능적으로 다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탐진치(貪瞋癡)에 빠져 그러한 것을 잘 모르게 됩니다. 스승 밑에서 수행하는 제자가 매일 아침 스승에게 공부를 점검받고 또 수행하고 점검받아 마침내 깨닫는 과정도 줄탁동시입니다. 옛날 중국에 덕산스님이라고 계셨습니다. 덕산스님은 특히 <금강경>에 아주 밝았습니다. 당시 중국 북쪽에서 금강경을 놓고 벌어진 숱한 논쟁에서 스님은 다른 쟁쟁한 스님들을 모두 이겼습니다. 그런 스님은 남쪽 오랑캐들 무리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중국에는 지역감정이 있어서 북방 사람들은 남방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있었죠. 스님은 선종을 따르는 오랑캐 무리들을 혼쭐내기로 작정하고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스님은 <금강경>과 <금강경>을 풀이한 주석서를 넣은 바랑을 등에 지고 의기양양하게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남쪽으로 간 스님은 당시 선종에서 가장 유명한 용담 스님이 있다는 절 근처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배가 고픈 스님이 떡을 파는 할머니에게 떡을 팔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스님에게 등에 진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죠. 스님은 등에 지고 있는 것은 금강경과 금강경을 해석한 책자라고 말하며 자신은 금강경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사람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근처에 용담이라는 오랑캐 중이 진리를 깨쳤다한다 길래 만나서 혼내주려고 멀리 북쪽에서 왔다는 말을 했어요. 그러자 할머니가 제가 내는 질문에 답을 하면 떡을 그냥 드리고 답을 못하면 팔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스님은 방금 점심(點心,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을 달라고 하셨죠? 금강경에는 ‘과거심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고 미래심도 불가득이라’고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시려오?” 그 순간 덕산스님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떡 파는 할머니의 일격에 자신만만했던 마음이 간데없이 사라진 스님은 절간으로 힘없이 걸음을 옮겼죠. 그날 밤, 용담 스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덕산스님은 밤이 깊어 숙소로 돌아가려고 스님 방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밖이 너무 어두워 등불을 부탁했죠. 용담 스님은 등불을 켜서 덕산스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런데 덕산스님이 신발을 신는 순간 용담 스님은 등불을 훅 불어서 꺼버렸죠. 그때 덕산스님이 깨달았다고 합니다. 절초봉생이죠? 절초봉생 이면서 줄탁동시입니다. 수행을 많이 해서 깨달을 만큼 다다른 사람은 누군가 한번 질문 만 잘해줘도 깨닫습니다. 서산스님은 어떻게 깨달았다고 하죠? 서산대사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깨달음에 지극해지면 갈 곳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절초봉생이라고 하고 졸탁동시라고 합니다. 약간 뜻은 다르지만 해석을 하면 비슷한 글이기도 정 반대의 글이기도 합니다.
누가 뭐래도 이 세상은 나 혼자 가야합니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조자일 뿐입니다. 또, 내 몸도 내 마음의 보조 밖에 되질 않습니다. 깨달은 사람, 금강의 지혜에 들어간 사람은 그 어느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야부 게송에 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꾸짖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현명한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때리거나 꾸짖지 않고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런 현명함은 자신을 잘 관찰하는데서 나옵니다.
부처님이 첫 깨달음을 열 때가 뭐였죠? 숙명통입니다. 부처님의 끝없는 과거를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현재 나를 관찰하고, 40대 나를 관찰하고, 20대 나를 관찰하고, 10대의 나를 관찰하고, 어릴 때 기어 다닐 때 나를 관찰하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를 관찰하고, 뱃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나는 어떠했는지를 끊임없이 계속해서 꾸준히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실체를 알아야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고, 어떻게 태어났고, 왜 죽어야하고, 죽어서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죽은 후에는 무엇을 만나는지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가장 큰 공덕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음을 이겨내고 깨달으면 부처가 됩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절초봉생, 졸탁동시이 되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끊어져서 갈 데 없는 사람, 안내자가 없어서 길을 헤매는 사람, 엄청 어렵죠? 이런 분들에게 안내자가 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겠죠? 날씨도 화창하고, 꽃도 피어 좋은 오늘, 법회에 참석하신 신도님들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찰하여 반드시 깨달을 것이라 믿습니다. 법회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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