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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숲과 사찰] 아기자기한 전등사 꽃밭 목장갑 낀 스님들 작품이네요 - 월간 山 202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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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109회 작성일 21-09-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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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등사

이미지 크게보기보물 제178호로 지정돼 있는 전등사 대웅보전 처마 아래 모습. 화재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13년(1621) 때 다시 세웠다. 이후 수차례 보수와 개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네 모서리에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나부상裸婦像이 이채롭다.
강화도 정족산(222m)에 자리잡은 전등사엔 일주문이 없다. 삼랑산성 혹은 정족산성으로 불리는 산성으로 둘러싸인 전등사로 들어가려면 성문을 통과해야 한다.  
남문으로 오르면 활엽수림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윤장대를 거쳐 대조루에 이른다.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서어나무, 느티나무, 고로쇠나무, 엄나무 등 활엽수 군락이 만들어내는 풍광은 특히 노란색과 갈색이 조화를 이루는 가을철에 아름답다고 한다. 전등사는 은해사 일주문 주변의 아름드리 낙락장송 같은 거목 군락이나, 내소사 들어가는 길목의 600m에 이르는 장대한 전나무숲 같은 압도적인 숲길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정족산자락을 비롯해 경내의 수백 년 전설이 서린 은행나무 외 느티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나무들의 조화로 소박하고 운치 있는 절길로 꼽힐 만하다. 
동문으로 들면 전혀 다른 풍광이다. 홍예문을 지나 대웅보전으로 가는 길가에 푸르른 소나무들이 서있다. 300년 동안 제자리에서 전등사와 이 땅의 개국 역사를 묵묵히 지켜봐 온 큰 소나무 한 그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대개는 1700년이 넘는(서기 381년 창건) 절의 역사에 비해 그다지 크지 않다. 아름드리로 곧게 자라기보다는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듯 다양한 자태로 서있다. 강화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참나무들의 기세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미지 크게보기대조루 아래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남문이든 동문이든 대웅보전으로 이르는 길은 가파르지 않다.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듯 걷다 보면 어느덧 절집의 한가운데. 넓지 않은 경내지만 아기자기한 조경으로 절 앞마당이 잘 관리되고 있음을 곧바로 알 수 있다. 특히 대웅보전 뒤편 산기슭의 소나무숲이 눈에 확 들어온다. 주변의 나무들보다 두드러지게 빼어난 소나무들은 사람의 세심한 손길이 미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해답은 바로 옆에 있었다. 마스크를 하고 삿갓 쓴 스님들이 목장갑을 낀 채 8월 뙤약볕 속에 분주하다. 전등사 숲의 아름다움에는 스님들의 손길이 배어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조선 개국의 역사와 함께한 전등사 소나무. 수령 300년
강화도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한반도 중심부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격동의 산실이었다. 고려와 조선 때는 외적의 침탈이 이어지는 와중에 임시 수도로서 기능했다. 몽골 침공 때 고려 왕실과 조정은 난을 피해 무려 60년간 이 섬에서 살았고, 조선 인조는 정묘호란 때 후금淸의 군사를 피해 역시 강화도로 파천했다. 서양국가들의 무력 시위가 이어지던 19세기 말에는 세계와 벽을 쌓고 있던 조선이 개국하게 되는 실마리를 제공한 곳이다. 
고려 문인 최자崔滋(1188~1260)는 ‘삼도부三都賦’에서, 서도西都인 평양, 북경北京인 송도, 강도江都인 강화를 삼도로 꼽으며 이렇게 적었다.
‘안으로 마니산·혈구산 등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고, 밖으로는 동진東津(지금의 통진산)·백마산 등이 사면으로 요새처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들고나갈 때는 동쪽의 갑화관(지금의 갑곶)으로 하고, 외국의 손님을 맞고 보낼 때는 북쪽의 풍포관을 이용한다. 두 화산華山의 봉우리가 문턱이 되니 참으로 천하의 그윽한 곳이다.…’ 
이미지 크게보기삼랑산성 서문 방향에서 바라본 전등사 전경.
강화도는 안과 밖이 첩첩 산중으로 둘러싸여  외적이 공략할 허점이 없는 아주 튼실한 곳이라는 말이다. 
전등사를 감싸고 있는 삼랑산성을 한 바퀴 돌면 최자의 안목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확함을 확인할 수 있다. 단군 왕검이 세 아들(부루, 부소, 부여)에게 봉우리 하나씩 성을 쌓게 해서 산성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삼국시대에 축성되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개보수됐다는 것이 정설인 듯하다. 이렇듯 천혜의 요새 속에 지어진 절이기에 왕조의 위기마다 피난처가 됐고 조선은 왕조실록까지 보관해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산행은 전등사를 기점으로 시작한다. 전등사 요사채를 돌아 오른쪽으로 난 길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 터로 가는 길이다 그곳에서 곧바로 오르면 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그 풍광은 예사롭지 않다. 산성과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전등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 마니산, 남쪽으로 인천 앞바다의 섬들이 펼쳐진다. 단군 전설이 깃들 만한 품격을 지닌 산이다. 산행시간은 2시간이면 넉넉하다. 전등사를 품고 있는 삼랑산성 성돌이 또한 반나절 산행코스로 알맞다. 들머리로 남문과 동문 어느 곳을 잡든 1시간30분이면 돌아볼 수 있으며,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문화유산 답사 코스로도 훌륭하다. 
바람 잘 날 없던 조선왕조실록 史庫와 전등사
조선시대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 유일하게 무사했던 전주사고본을 묘향산사고로 피란시켰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겼는데 1653년 또다시 실화失火로 불타자 선조의 외손자 유심柳淰은 1659년 강화 유수로 부임 후 ‘삼랑산성이 외적 침입에 천혜의 요소이므로 왕실 세보와 문적, 그리고 실록을 전등사 경내로 옮기는 게 좋겠다’는 뜻을 조정에 올렸다. 조정은 10여 년간의 숙의 후 숙종 4년(1678년)에 전주사고에 보관돼 있던 책을 정족산사고로 옮겨 장사각藏史閣에 보관했다. 이후 전등사는 사고 수호 사찰로 지정됐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사고에 옮겨진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네 부를 만들어 한양의 춘추관과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에 사고를 다시 지어, 정족산사고와 함께 모두 다섯 군데 사고에 보관했다. 
이미지 크게보기전등사 동문에 있는 국화밭 화단의 잡초를 솎아내고 있는 스님들. 아름다운 전등사 경내는 스님들의 울력으로 이뤄낸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선왕조실록의 운명은 조선의 근현대사처럼 바람이 잠잠할 날이 없었다. 춘추관사고본은 1811년 화재로 불타 없어졌고, 조선이 국권을 상실한 뒤 오대산사고본은 일본으로 반출, 적상산사고본은 한국전쟁 중 분실됐다. 
정족산사고에 보관돼 있던 서책들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규장각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겨져 관리됐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등사에 사고가 복원된 것은 1999년.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아 있던 건물을 다시 지었다. 대웅보전 앞 누각인 대조루에 걸려 있던 장사각 현판도 이때 다시 복원된 건물에 걸었다. 현재 복원된 사고 또한 전등사가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하고 관리했던 것처럼 지금도 전등사가 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새 건물은 실록이 없는 텅 빈 곳이지만 적송 숲에 둘러싸인 전등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강화도 앞바다와 초지대교가 펼쳐진 조망이 시원하다. 장사각 오른쪽으로 난 좁다란 산길을 조금 오르면 정족산성(삼랑산성) 북문이다.
본 기사는 월간산 9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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