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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천 섬 기행]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에서 추억을 긷다 - 인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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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203회 작성일 20-09-0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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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천혜의 요새 삼랑성과 전등사(1)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ㅣ일 년에 몇 번은 가는 전등사와 삼랑성은 갈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아담한 사찰이지만 꽤나 멋지게 지어진 대웅전과 약사전, 사시사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삼랑성의 풍광에 항상 눈이 호사를 누린다.

이밖에도 고려 가궐지와 정족산 사고가 있고, 이를 수호할 목적으로 설치된 정족산성진지, 병인양요를 승리로 이끈 양헌수 승전비 등 역사가 담긴 터전과 각종 재미있는 설화가 얽혀있어 하루 나들이의 최적 장소로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강화도 지도 병풍 제1폭 정족산성진 일대(19세기 후반,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강화도 지도 병풍 제1폭 정족산성진 일대(19세기 후반,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

30여 년 전에 강화도에 들어갈 때는 버스를 이용했기에 전등사에 가려면 온수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걸어서 동문으로 올라갔다. 널따란 동문주차장을 지나면 향토음식점들이 나온다. 예전에 문을 닫은 삼학장여관에 여러 차례 묶으면서 강화도를 탐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차량으로 이동하다보니 탐방 동선을 위해 남문을 이용한다.

사적 제130호인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인 부소, 부우, 부여가 쌓았다고 전해진다. 고려 시대에는 주로 삼랑성이라 불렸으나 조선 광해군 때부터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했다. 아마도 해발 222m인 정족산을 중심으로 봉우리 세 개가 솥의 다리처럼 받치고 있어 정족산성 또는 삼랑성이라 이름 붙였는데 호사가들이 단군이 쌓은 마니산의 참성단과 연결해 세 아들의 이야기를 붙인 것이 아닐런지.

삼랑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그 위에 거칠게 깬 돌을 맞춰가며 쌓았고, 성벽 안에는 막돌을 채운 삼국시대의 축성 기법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한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성의 둘레는 대략 2.3km로 포곡식 산성(골짜기를 끼고 주변 산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산성)이다. 현재 많은 부분을 복원해 멋진 산성 길을 만들었다.

삼람성 남문 문루인 종해루(1976년 복원).삼람성 남문 문루인 종해루(1976년 복원).

삼랑성 안의 소소한 볼거리

삼랑성에는 원래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었다. 영조 15년(1739)에 적이 접근하기 쉬운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며 성곽과 문루가 무너졌던 것을 1976년에 지금과 같이 복원했다. 이번 장마로 남문 앞 계단이 무너졌는지 계단을 다 들어내고 공사 중이다.

남문을 통과하면 길이 전등사 쪽으로 쭉 뻗어있다. 예전에는 이 앞에 시냇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었는데 복개했다. 30m쯤 올라가 부도전으로 향하는 길에 자그마한 돌다리가 있다. 복개하기 전에는 이 다리를 건너 전등사로 올라갔다. 앙증맞은 것 같은 느낌의 돌다리는 반달처럼 굽은 모양인데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약간 층이 지게 계단석을 맞췄다. 양쪽 난간도 대나무 모양으로 다리에 붙여 간단하게 표현했다.

해태상이 조각된 돌다리.해태상이 조각된 돌다리.

난간의 양쪽 끝에는 석수들을 조각해놓았는데 시비나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인 것 같다. 민간에서는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간주한다. 이 정도 작은 규모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단하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멋진 다리이다. 그런데 한쪽은 복개하면서 흙으로 길을 만들어 대부분의 사람이 무심코 지나쳐가는 것이 아쉽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50m쯤 올라가면 부도전이 나온다. 부도(浮屠)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탑과는 달리 덕이 높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탑이다. 구성 요소는 일반 탑들과 마찬가지로 기단부ㆍ탑신부ㆍ상륜부로 돼있지만, 불탑과 달리 상륜부가 간단하게 장식됐다. 형태는 보통 팔각원당형, 방형, 석종형(복발형) 등으로 구분된다. 이곳에는 서운대종사 탑비와 부도를 비롯해 그동안 전등사를 거쳐 간 스님들의 부도 3기가 더 세워져있다.

전등사 부도전.전등사 부도전.

정면에 자리 잡은 서운대종사 부도는 조선시대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알려진 보물 제388호인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을 그대로 본떴다. 부도전 양쪽 앞에 있는 쌍사자 석등도 무학대사탑 앞에 있는 석등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이다. 아마도 서운대종사를 기리는 사람들의 정성이 무학대사탑을 모사한 것이리라.

길을 조금 오르다 동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문으로 가는 길 좌우로 수령이 꽤나 되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이 늘어서있다. 그런데 소나무들의 하단부가 껍질이 벗겨진 채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으로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자 마구잡이식 수탈을 자행했다. 곡물과 광물의 수탈 물량을 늘렸고, 철강재도 부족하자 사찰에 있는 종과 집에 있는 놋그릇과 숟가락까지 공출이라는 명분으로 마구 뜯어갔다. 전투기에 쓸 연료를 만든다며 송진 채취를 강요해 농촌, 도시 할 것 없이 소나무가 있는 곳이면 마구 송진을 수탈했다. 이때의 상처가 지금까지 남아 식민지의 아픔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강화도 주민들이 1873년에 세운 양헌수 승전비.강화도 주민들이 1873년에 세운 양헌수 승전비.

양헌수 승전비

삼랑성 동문 못 미쳐 왼쪽 축대 위에 인천시 기념물 제36호인 ‘양헌수 승전비’가 비각 안에 안치돼있다. 병인양요(1866) 때 정족산성(삼랑성) 남문과 동문으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물리쳐 승리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이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사살된 6명을 포함해 사상자 60∼70명이 발생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과 더 이상의 교전이 불리함을 깨닫고 강화도에서 철수한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군대는 전사 1명, 부상 4명의 해를 입었다. 화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전과를 올린 것은 양헌수 장군의 뛰어난 전략 덕분이었다.

1873년(고종 10년, 계유년) 2월에 강화도 주민들이 비를 세웠는데, 비의 앞면에는 ‘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라 쓰여 있다. 순무(巡撫)는 순무사(巡撫使)의 준말로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와 전시에 군무(軍務)를 맡아보는 한편, 백성들을 위무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일을 담당하는 임시 관직이다. 천총(千摠)은 조선 후기 각 군영에 소속됐던 정3품 무관직을 일컫는다.

비의 뒷면에는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의 공적이 수록돼있는데 ‘차가운 강화도의 10월에 칼을 휘두르며 군사를 통솔해 서양 오랑캐를 무찔러 깃발이 다시 있지 않았다’라고 공적을 기록했다.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임금 3년인 병인년(고종 3년, 1866년) 9월에 서양 오랑캐가 강화에 쳐들어왔는데 적의 형세가 더욱 창궐했다. 순무사 이경하가 그곳에 있으면서 중군 이용희와 천총 양헌수를 징발해 통진에 진을 치고 주둔하게 했다. 양공이 분발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별군관인 이기혁ㆍ이현규ㆍ이병숙과 초관인 이렴ㆍ김기명ㆍ이대흥을 거느리고 행군했고, 집사인 이해진ㆍ지홍관은 산포수 500명을 선발해 음력 10월 초하룻날 밤에 손돌항을 건너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초삼일에 적이 성 아래에 가까이 쳐들어오니 양공은 힘을 내어 싸움을 격려해 한꺼번에 총포를 쏘아댔다. 적의 우두머리가 먼저 죽고 오랑캐들이 널브러져 죽자 수레에 시체를 싣고 달아났다. 공이 이에 강화부성을 회복하고 병사와 백성을 위로하니 모두 안도했다. 성의 노인들이 감격해 단단하고 좋은 돌에 공적을 기록해 돌의 결이 갈라지지 않기를 기약했다. 오늘날 강도의 백성들이 부모와 처자 형제가 있어 서로 보양하고 서로 기르게 된 것은 오직 공의 은혜이니 영원토록 사모하노라.”

삼람성 동문.삼람성 동문.

랑성 동문에서 추억을 긷다

삼랑성 동문은 남문처럼 다듬은 돌로 웅장하게 쌓은 것이 아니라 커다란 막돌로 문의 기둥을 쌓고 그 위에 벽돌로 홍예(虹霓,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원형이 되게 만든 것)를 가지런히 올렸다. 아마도 벽돌로 된 홍예는 문루의 무게를 버티기 힘들 것이기에 문루를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벽돌로 홍예만 올린 성문은 전등사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수원 화성의 암문은 성벽 자체를 다 벽돌로 쌓은 전성(磚城)이기에 이곳과는 다르게 봐야 한다.

이곳 동문에만 오면 머릿속을 간질이며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예전에 전등사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삼랑성 동문으로 올라왔다. 그래서 동문 바로 앞 길 양쪽으로는 지금도 변함없이 토속음식점이 몇 집 있다. 전등사를 탐방하고 돌아갈 때는 파전에 막걸리를 한잔 걸치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내려갔던 기억도 눈에 선하다.

처음 전등사를 답사하던 때가 30대였는데 무려 강산이 세 번 바뀌어 벌써 60대이니, 세월은 쏜 화살과 같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전등사와 삼랑성 길을 걷다 보면 땅바닥에 무수히 떨어져 있는 내 추억들을 하나하나 만날 것도 같다. 이렇게 인천을 돌아보는 것이 추억을 긷는 행위는 아닐는지. 아름다운 추억들을 세월 속에 만나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350년 동안 삼랑성 동문을 지켜온 느티나무.350년 동안 삼랑성 동문을 지켜온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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