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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강화도 전등사에서-미디어붓다20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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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237회 작성일 20-01-1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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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규 작가《山門, 서울을 따라 간 산사들2》

강화도(江華島), 전등사(傳燈寺)에서

2020-01-14 (화) 05:56

우봉규 |


나막신 신고 산에 오르니 흥은 절로 맑고
전등사 노승은 나의 행차 인도하네.
창밖의 먼 산은 하늘 끝에 벌였고,
루(樓) 밑에 부는 바람 물결치고 일어나네.
세월 속의 역사는 오태사(俉太史)가 까마득한데,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에 아득하다.
정화궁주의 원당(願幢)을 뉘라서 고쳐 세우리
벽기(壁記)에 쌓인 먼지 내 마음 상하게 하네.
<목은 이색의 시>
 

무아무인천 (無我無人天)1, 2018, 종이 위에 혼합재료, 130.3 x 162.2cm.jpg
그림 황명라. 무아무인천 (無我無人天)1, 2018, 종이 위에 혼합재료, 130.3 x 162.2cm
 
 
우리나라 사찰에 그 이름만큼 아름다운 사찰이 있을까? 그러나 그 아름다운 이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전등사(傳燈寺)다. 전등사란 이름의 유래야 분분하더라도 전등사는 '전등(傳燈)'이라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우리들의 먹먹한 가슴을 밝게 하는 형광의 의미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게다가 이 사찰이 위치하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 또한 만만하지 않다.
 
그 전등사를 방문하기 위해 절 밑의 여관에서 묵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운 없게도 냉방이었다. 밤새 때리던 장대 같은 겨울비는 일단 그쳐 있었지만 몸속에 들어박힌 냉기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추하게 주차장으로 변한 삼랑성 바로 밑까지 왔을 때에는 어느새 몸에 원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아마도 새벽의 신선한 공기 탓일 것이다.
아무도 없는 호젓한 전등사 순례를 예상했었는데 어떻게들 지난밤의 비를 뚫고 왔는지 많은 사람들이 삼랑성 안으로 대거 진입하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부근의 강화관광호텔에서 묵은 중국인들이 대다수였다.
“……”
전등사 여행객이라고 하여 누구나 다 여말 당대의 대시인 이색(李穡)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누구나 부처님께 옥등잔(玉燈盞)을 바친 정화궁주의 아름다운 마음일 수는 있다.
 
전등사 대조루(對潮樓)-.
조수가 밀려오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하여 붙은 이름, 전등사라는 현판이 붙은 이곳에 서면 정말로 마치 강물 같은 바다와 올망졸망한 삼랑성의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길게 드리워진 마니산의 능선들과 거친 바닷바람을 피해 자리 잡은 일단의 마을들이 성냥곽처럼 배열되어 있다.
그러나 대조루 2층은 잡화점으로 변해있다. 절을 찾은 사람들에게 간단한 방물과 책을 준비하고 있다. 각종 불교서적들과 불구들이 관광기념품과 함께 진열되어 있어 우선은 편하다. 더구나 대웅전 맞은편의 장소 또한‥‥
그러나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눈에 보이는,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무형 문화재의 손실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마음, 대조루는 대객점(對客店)으로 바뀐 것이다. 대조루 옆의 바위에 새겨진 목은의 시 또한 비바람에 젖고 있었다. 마모되고 있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버티어 온 소중한 유산들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었다. 진정으로, 찾아온 행랑객들의 이해와 편리를 위해서라면 경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절 한쪽에 아담한 기념품점을 만들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단군 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 안에 색시처럼 수줍은 얼굴로 곱게 자리 잡은 전등사-. 그 전등사는 이제 봄부터 준비했던 화려한 의상을 벗고, 순백의 신부처럼 부끄럽지만 겪어야만 하는 밤으로의, 겨울로의 긴 여행을 시작하고 있다.
이 나라에는 무수한 사찰들이 있지만 이 강화의 사찰들은 본질적으로 그 궤를 달리한다. 강화도라는 지역적 특성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시발이요, 또한 종착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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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장명확

 
                                                                          
고래로 내려온 무덤들, 또한 무너진 절터들, 그 흔적조차 없어진 무덤들과 절터를 찾는 일은 다름 아닌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진정으로 불교가 우리들에게 무엇이어야 한다는 깨침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여러 가지 설이야 많지만 이곳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불교가 전해진 곳이고,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부처님을 따르다가 숨진 이들의 땅이다. 인간이란 항용 역경에 처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그리고 미래를 꿈꾼다. 강화는 헤아릴 수 없는 역사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다간 사람들의 땅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을 붙잡았다. 부처님께 애원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오로지 불심만이 가득한 금빛 만다라의 세계를.
 
그래서 고려청자를 빚었고, 금속활자를 만들어 냈으며,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다. 부처님 말씀은 그들에게 생명수였고, 삶의 본질이었다. 물러설 곳 없는 벼랑. 조선 이씨들에게 내몰린 고려 왕씨들이 그랬고, 나약한 육지의 동족이 쏘아올린 화살에 맞아 죽은 삼별초들이 그러했다.
 
현재에는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들. 또는 북으로 건너간 많은 강화 사람들로 하여, '강화는 빨갱이 반'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군사정권의 눈치를 살펴야했던 세월도 있었다.
서울의 관문이었기에 언제나 외세의 침탈을 가장 먼저 받아야 했고, 육지와 떨어진 섬이었기에 잔인한 왜구와 중국 해적들의 약탈 대상이기도 했다. 물론 서울이라는 중앙에서 거세당한 많은 정치학자들의 울분토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강화의 사찰들은 육지 심산유곡의 사찰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그래서 강화의 사찰들은 수행하는 수도자들의 사찰만이 아니라는 얘기다. 생사를 초월한 무서운 불심, 그들의 총집결체가 바로 강화 사찰의 진정한 의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도 강화도가 역사의 버거운 짐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화땅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자신의 본분을 다 마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강화도는 울분의 땅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땅이다. 황해도, 평안도를 넘보며 눈물짓고 있는 땅이다. 그 옛날 삼국 이전부터 주 쟁탈지역의 하나였던 강화도는 지금도 그 분단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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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약사전 ⓒ장명확
 
 
이곳에 전등사가 있는 것은 자못 의미심장한· 하늘의 계략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쩌면 부처님의 숨은 뜻인지도 모른다. 남북한의 국토를 갈라보면서 부처님 법을 밝히는 절, 육조 혜능 대사의 의발이 전해졌다고도 하고, 정화궁주의 옥등잔이 안치되었다고도 하는 전등의 의미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한다. 이 강화에서 오늘까지 반짝이고 있는 전등의 진정한 의미를.
불교가 이 강화에 와서 비로소 개인적인 수행의 불교가 아니라, 또한 그 도량으로서의 사찰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원이 담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공동체꽃의 의미로 용해된다.
모래알처럼 서로의 머리속에 각각 나뉘어 가지고 있는 불국토가 하나로 되는 것이다. 이곳에 와서 우리의 불교는 비로소 하나의 정형적인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는 맑게 홀로 수행하는 선승들이 올 곳이 되지 못한다. 이곳은 고통 받는 민중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부처님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의 사찰들엔 우리가 흔히 귀하게 여기는 대선지식들이 나오지 못했다. 아니 나을 수가 없었다. 정통에 끼지 못한 야인들만이 이곳에서 이름 없이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왜적에 맞서 목숨을 던진 병사들도 있었고,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다가 수명을 다한 장인들도 있었다. 전장의 아수라장에서 자신과 가솔들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두 손 모아 빌던 아낙네들도 물론 있었다.
우리 땅에 원통한 무덤 없는 땅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곳 강화는 그 무덤들 열에 절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등사는 말이 없다. 전등사를 지켜온 절 밑의 은행나무만이 지금 뽀얀 속살을 부끄럽게 내보이고 있다.
이곳 대웅보전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진기한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다름 아닌 법당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여인의 나상이 그것인데, 발가벗은 여인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사연인 즉-.
"법당만 다 지으면 우리 이곳에서 함께 살아요."
"당신만 좋다면 육지에 다신 나가지 않을 거야."
대웅전 건립의 도편수가 공사 중에 우연히 마을의 어느 여인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 깊은사랑에 빠져 공사 중에도 틈틈이 그 여인을 만나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다. 여인은 언제나 눈웃음을 쳤다. 고된 노역으로 찌든 도편수의 눈엔 그 여인이 곧 선녀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다.
"당신이 버는 돈을 전부 제게 맡겨요. 나중에 우리들이 아이를 낳으면‥‥ 그때‥‥ 그때‥‥‥"
"아암, 여부가 있나. 내 노임을 받는 즉시 당신에게 갖다 바치리다."
도편수는 그가 받은 노임을 몽땅 여인에게 갖다 바쳤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못 줄 것이 무엇인가?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도 일절 끊고, 좋아하던 술마저도 입에 대지 않았다. 오로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할 미래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는 법당을 짓는데 전념하였다. 그 여인과 살림을 차리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마무리해야 했던 것이다. 그의 이런 불같은 열정 탓으로 어느덧 대웅전 불사건립도 거의 마무리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배신과 증오를 끌어안은 해학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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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나부상 ⓒ장명확
 
 
이제 지붕만 얹으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여인과 늘 만나던 회화나무 아래로 갔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함께 살수 있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달과 별이 지고 새벽의 먼동이 터올 때까지 여인은 오지 않았다. 혹시 병이라도 났나? 걱정이 되어 그는 절대로 자신의 근처에도 오지 말라는 여인의 다짐을 뒤로 하고 조심스럽게 여인이 산다는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도편수는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아, 알겠어요, 누구를 말하는지. 그 아낙네는 집도 절도 없어요. 또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돈을 들고 물 건너갔을 거예요."
도편수는 실성한 모습으로 나루터로 달려갔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푸른 물결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는 우리의 짐작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필경 다른 전설 같으면 비탄에 빠진 도편수가 바닷물에 빠져 죽어 무슨 바위가 되었다든가, 혹은 무슨 꽃이 되었다든가 하는 애절한 방식으로 엮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전등사 법당에 얽힌 전설은 아주 해학적인 쪽으로 흘러간다. 절망한 도편수는 식음을 전폐했다. 완성을 기다리는 법당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많은 대중들의 원성이 있었지만  도편수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는 점점 야위어갔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곧 죽을 것이라며 송장을 치울 날짜를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던 어느 날 그는 거짓말같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끌과 대패가 야무지게 들려 있었다.
그리고 법당을 짓기 시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는 법당의 기둥 위에 떠나간 여인의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해 놓고 무거운 지붕을 받들게 했다. 지난날의 사랑이 증오로 변했던 것이다.
이렇게 도편수는 자기를 배신한 여인에게 법당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고통을 수백 년 동안 주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사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나상을 보는 사람들의 입가에는 저절로 웃음이 맴돈다. 어쩐 일일까?
 
그것은 아마도 아무리 풀길 없는 한과 증오도 막상 절 안에 이르면, 부처님의 품안에 이르면, 따뜻하고 해학적인 것으로 용해되어 버리는 독특한 우리만의 양식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옛 얘기 중에 못 말리는 스님에 대한 우스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그만큼 절과 스님들은 언제나 민중들과 친숙했다는 증좌다.
 
전등, 꺼지지 않는 진리의 등불
 
보물 제178호인 이 대웅보전 말고도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은 모두 창건 미상이다. 다만 광해군 때 그 지붕만을 개수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밖에 전등사에 삼성각, 향로전, 적묵당. 강설당, 극락암 같은 건물들이 있다.
그러나 특히 유명한 것은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범종이다. 이 종은 우리나라 종과는 형태가 완전히 다른 중국에서 주조된 송대의 종이다. 희미하지만 남아있는 명문을 보면 1097년 송의 숭명사라는 절에서 만든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종은 일제 말기에 군수물자로 징발당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 있는 것을 다시 이곳 전등사로 옮겨온 유물이다. 이 밖에도 정수사(淨水寺)에서 판각한 법화경 목판 104매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런 유형적인 유산보다도 강화가, 전등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실로 헤아리기 어려운 정신적 유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강화가 겪은 많은 전란. 그 위협적인 사건들을 무난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부처님을 믿고 따랐던 우리들 선조의 엄숙한 신앙의 힘이었다. 또한 부처님 도량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많은 스님들의 불굴의 정신 때문이었다.
전등(傳燈), 이 꺼지지 않는 진리의 등불은 정녕 오늘의 시대에 더욱 밝게 밝혀져야 남북한 모두를 밝히는 거룩한 등불로 다시 지펴져야 한다. 평안도로도 가고, 황해도로도 가는 뱃길이 환하게 열리는 날 비로소 전등사는 불교뿐만 아니라 이 나라 올곧은 정신의 진앙지로 자리 잡을 것이다.
 
 
작가 우봉규
 
<산문, 서울을 따라 간 산사들 >을 시작하는 우봉규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작가다.
[황금사과]로 동양문학상 수상을 시작으로, [객사]로 월간문학상을, [남태강곡]으로 삼성문학상을, [夕汀詩의 佛敎的 解明]으로 해인상을, [갈매기야 훨훨 날아라]로 계몽아동문학상을 받았다. 또한 한국일보사의 광복 50주년 기념작에 [눈꽃]이 당선되었다. 그는 불교와 신화가 결합된 민족 설화와 분단에 관한 순수 희곡 작품에 주력해 왔으며, [저편 서녘], [통닭집 여자와 곱추 이발사], [종착역], [객사], [裸婦像畵] 등을 통해 우리나라 희곡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불교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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