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모진 풍파 이겨내며 지켜온 1640년의 세월-인천i-view 202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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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1,092회 작성일 21-06-17 09:04본문
➅ 길상면-전등사와 정족사고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강화도는 선사 시대 이래 우리나라 역사의 아이콘을 모두 품은 ‘보물섬’입니다. 고인돌, 고려궁지, 외규장각, 광성보, 천주교성지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엔 지금 반만년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뚜껑 없는 박물관, 역사의 보고. 강화도를 얘기할 때면 언제나처럼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죠. 봄맞이 개편과 함께 i-View가 새 연재를 시작하는 ‘길 위의 강화도’는 5000년 강화도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에피소드(episode) 중심으로 전개해 나갈 강화도의 신비로운 유적과 유물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
전등사(傳燈寺)는 언제 찾아도 맑고 신비롭다. 사찰 입구에서 본사로 오르는 구불구불한 오르막 길과 새벽녘과 어스름한 저녁시간 울려 퍼지는 목어소리.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찰이란 사실과 처마를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의 전설에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관한 ‘정족사고’까지 마주하고 나면 신비로운 느낌은 배가한다.

입구에서 전등사로 오르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대개 남문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서 오르지만, 나무숲 터널을 지나 좁고 가파른 경사로가 이어진 동문을 통해도 운치가 있다. 남문으로 오르는 길은 시원한 눈맛을 주며, 동문 길은 구중심처로 들어가는 기분을 선사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사찰인 전등사, 문화재만 21점
전등사는 삼국시대인 381년 아도화상이 지금의 자리에 진종사(眞宗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다. 이후 1600여 년간 묵묵히 한자리를 지켜오며 터와 사찰이 모두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찰로 남았다. 진종사가 전등사로 이름을 바꾼 때는 1282년. 고려 충렬왕(25대)의 비인 정화궁주가 몽골에 볼모로 끌려간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빌며 옥등을 시주하면서 전등사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전등사의 가치는 경내 건축물 등 상당수가 문화재인 것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대웅전(보물 제178호)을 비롯해 약사전(보물 제179호), 철종(보물 제393호) 등 전등사엔 보물만 6점이 존재한다.
여기에 사적 1점과 현왕탱(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3호), 법화경판(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5호) 등 시 유형문화재 7점, 유형문화재 자료 3점, 인천시기념물 3점, 현충 시설 1점 등 무려 21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전등사는 사찰에 있는 건축물과 유물, 유적지 전체가 보물이고 문화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웅전은 1605년 절반이 불에 탔던 것을 1614~1621년 다시 지은 것이라고 <양간록>은 전한다. 대웅전의 처마 밑 4개의 기둥 모서리엔 두 손으로 처마를 힘겹게 받치고 있는 인형들이 있다. 사람들이 나부상(裸婦像)이라 부르는 이 인형들은 불에 탄 대웅전을 다시 짓던 도편수(목수)가 자신을 배신한 여인을 체벌하는 의미로 새겼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렇지만 이 조각상은 불교의 가르침을 사방에서 수호하는 ‘호법신장’일 가능성도 있다. 법주사 팔상전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조선 중기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나부상의 표정이 익살스러워 원숭이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삼랑성, 프랑스군 물리친 양헌수 장군 승전비 눈길
전등사를 오르려면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을 지나가야 한다. 정족산성이라고도 부르는 이 산성은 조불전쟁(병인양요, 1866) 당시 승려, 의병, 관군이 힘을 합해 프랑스군을 물리친 국방유적지다.
대웅전과 약사전에 무수한 병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동문 앞에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서 있는 까닭이다. 조불전쟁 당시 전등사 스님들은 정족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문서를 토굴로 옮겨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정족사고의 ‘장사각’은 실록을, ‘선원보각’은 <선원세보>를 비롯한 왕실 족보 등을 각각 보관하던 곳이다. 전국 4대 사고 가운데 가장 방대한 실록과 왕실 서적을 관리하고 있었다. 정족사고의 서적들은 일제강점기 때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옮긴이래 규장각이 지금까지 1181책을 보관 중이다. 일제가 옮긴 것이므로 본래 있던 자리로 반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지금의 정족사고 건물은 불에 탔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 이따금 전시 등의 행사가 열린다.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온 조불전쟁 당시 전등사는 전투 요새로 변신한다. 당시 전등사 스님들과 의병, 함경도를 비롯해 전국에서 모여든 범포수들은 정족산에 배수진을 친 뒤 격렬한 전쟁 끝에 외적을 쫓아낸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왕실 서적이 전등사 경내 정족사고에 보관돼 있었으므로 더더욱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1640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한 해 60만여 명이 찾는 국민 관광지로 사랑받고 있다.
간척지로 조성한 넓은 농경지 품은 도농복합지로 강화 남부권역 중심 오롯
전등사를 품은 길상면은 조선시대 길상산(374m)의 이름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강화도 남쪽 해안에 홀로 떠있는 섬처럼 보이는 길상산엔 말을 키우는 양마목장(良馬牧場)이 있었다. 임금께 진상하던 약쑥이 풍부했고 감목관청에서 향탄(香炭)을 공급하며 행운이 깃들었다는 의미로 길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남쪽 자락에는 택지돈대(宅只墩臺)가 있고 가천대학교 강화캠퍼스가 있고 전등사는 북쪽 능선에 위치한다. 간척지로 넓은 농경지를 이루는 길상면은 해안선에 인접한 지역으로 강화 남부권역의 중심도시이며, 도시와 농촌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도농 복합 지역이다.
호국의 역사문화 관광명승지로 단군의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사적 130호), 고려시대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동국이상국집을 펴낸 이규보 선생의 묘(인천시지정기념물 15호), 1871년 조미전쟁(신미양요) 때 격전이 벌어진 초지진(사적 225호) 등이 있어 남한에서 유일하게 고려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지역이라 하겠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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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릉 가는 길
무덤에서 흘러나오는 고려왕실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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