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주제가 있는 사찰 기행 ] -사고수호사(史庫守護寺) ⑤ 전등사 정족산 사고 - 불교신문 202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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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1,072회 작성일 21-04-18 12:33본문
프랑스 침입군 맞서 승병 249명이 함께 지켰다
강화 전등사 정족산 사고 전경. 일제 때 사라졌던 사고를 1997년 복원했다.
선조 36년 마니산 재궁에 보관
전주사고본은 1592년 6월22일부터 1593년 7월9일까지 1년 18일간 내장산에 머물다 충청도 아산으로 갔다. 해주와 강화를 거쳐 평안도 안변 묘현산 보현사에 이안됐다. 전쟁이 끝난 뒤 보현사에서 영변부 객사로 옮겼다가 선조 36년(1603) 다시 강화도로 갔다. 강화부 봉선전(奉先殿) 서쪽에 사고를 만들고 실록을 옮겼다. 그 곳에서 1606년(선조 39)까지 2년9개월 동안 전주본을 저본으로 삼아 태조에서 명종까지 총 804권의 실록을 다시 출판했다. 그리하여 전주사고에 있던 원본, 새로 만든 3부와 교정본 모두 5부의 실록이 완성됐다. 정본 가운데 1본은 예전처럼 서울 춘추관에 보관하고 나머지 2본 중 하나는 태백산 사고와 묘향산 사고, 교정본은 오대산 사고에 보관했다. 원본인 전주사고본은 복사본을 편찬했던 강화부에 남았다.
그런데 강화부가 읍내에 있어 불안했던 모양이다. 전쟁이 막 끝난 후라 서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복사본을 편찬했다. 그만큼 왕실에서는 실록 편찬을 중요하게 여겼다. 실록 편찬 작업이 끝나고 5사고(五史庫)가 정해진 1606년경 강화부 안에 있던 사고를 마니산 기슭 덕포리로 옮겼다. 마니산사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은 없고 마니산의 재궁(齋宮)이 낮은 곳에 있어 옮길 것을 명한 사실 등으로 보아, 덕포리 서재곡(書齋谷)에 사고로 쓸 만한 재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마니산사고에 있던 실록이 많이 없어지고 훼손됐다. 설상가상 1653년(효종 4)에 화재를 당했다. 현종 때 실록을 보수하고, 1678년(숙종 4) 강화도 안 정족산(鼎足山)에 사고를 새로 짓고 덕포리에 있던 실록과 책들을 옮겼다.
그리고 정족산성 안에 있던 전등사(傳燈寺)를 사고 수호 사찰로 정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했다. 당호는 영조대왕이 이곳에 잠시 머물 때 친필로 내렸다.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로 전등사를 중수(重修)했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해졌다. 선원각에 왕실 세보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했다.
4월6일 전등사(傳燈寺)로 갔다. 삼성각을 지나면 정족산 사고가 나온다. 일제 때에 사라졌던 사고를 1997년 복원했다. 실록을 보관하던 건물인 장사각(藏史閣)은 2층 누각형태의 오대산 영감사 사고나 적상산 안국사 사고와 달리 단층 건물로 지은 점이 특이하다. 앞면 4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창고 형태의 건물이다. 습기 등으로 문서가 훼손되지 않도록 벽면 아래쪽에 환기구를 두고 있다.
전등사 전경.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는 천년고찰이다.
1930년대까지 존속, 1999년 다시 복원
장사각 옆에는 앞면 3칸 규모의 작은 건물 선원보각(璿源寶閣)이 있다.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보관하던 곳이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뒤 태백산 사고와 규장각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분실에 옮겨 보관됐다. 이후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뒤, 광복 후에도 후신인 서울대학교에서 보존 관리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다. 1931년에 간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 사고 사진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실록을 옮겨간 뒤에도 적어도 20년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은 전등사가 보존하고 있다.
현재 복원한 사고 또한 전등사가 관리한다. 조선시대 사고를 보관하고 관리했던 것처럼 전등사가 그 역할을 수행 중이다. 전등사(傳燈寺)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개산한 천년고찰이다. 당시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 고려 충렬왕 때 왕비 정화궁주가 ‘인기(印寄)’라는 스님을 송나라에 보내서 대장경을 찍어오게 해서 전등사에 두었고, 구슬로 만든 ‘옥등(玉燈)’을 헌납한 일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을 고쳤다.
전등사는 삼랑산성 안에 있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三郞城)이라고 한다.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부른다. 다리 세 개 달린 솥을 정(鼎)이라고 하니 이 역시 셋과 관련 있다. 산능선이 세 줄기다.
고려 수도 개성과 조선 수도 한양이 모두 강화도를 지나 강을 따라 들어가니 군사적 요충지다. 고려는 몽골 침입을 피해 강화도에 임시 수도를 정하고 오랫동안 항전했고, 인조도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파천하려 했지만 몽골 때 한 번 당했던 터라 미리 막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러한 지리적 군사적 요인으로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을 세웠고, 조선은 사고(史庫)를 세웠다.
정족산성.
목숨 바쳐 지킨 승군, 간첩노릇 천주교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앞바다에 진을 쳤다. 그들은 강화도에 세운 행궁과 조선의 각종 중요 서류를 보관했던 외규장각에 관심을 가졌다. 옥책과 은괴 19상자를 비롯해 귀중하다싶은 것은 모두 배에 실어 본국으로 빼돌렸다. 이때 프랑스는 서적 1000여 종, 6000책 중에서 200여 종, 340책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남김없이 불태워 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강화부의 궁전과 외규장각 건물까지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강화를 약탈했던 프랑스의 한 장교는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고 실토했다. 그렇게 빼앗아 간 도서들은 현재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도 들어 있었다.
전등사 경내에 위치한 수백년 수령의 느티나무.
그러나 프랑스군은 삼랑산성과 전등사, 전등사 사고는 끝내 침탈하지 못했다. 홍예문(虹霓門)이라 쓰인 동문을 들어서면 양헌수장군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가 나온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에 승전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전등사 승병 249명이 함께 싸워 지켰다. 성과 사고와 사찰과 백성을 지켰다. 나라와 백성보다 자신의 종교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천주교도들은 조선군의 이동과 군세를 프랑스군에 알려주고 길잡이를 했다.
승전비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대조루(對潮樓) 2층 누각이 맞는다. 그 곳에 서면 ‘염하’라 불리는 강화해협과 해협을 가로지른 초지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양현수 장군과 백성들, 승병도 이 누각에서 바라보았으리라.
병인양요 때 승병 병사들이 부처님께 승전을 당부하며 전등사 대웅전에 쓴 글씨.
대웅전에 승전 염원 낙서 남아
대조루 뒤 대웅전은 전생의 부처님과 원숭이 인연을 새긴 나부상(裸婦像)으로 유명한 보물 제178호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13년(1621년)에 다시 지었다. 대웅전 내부 기둥과 벽체에 사람들 이름을 적어놓은 글씨가 흐릿하게 남아 있다. 프랑스군과 전투 때 불보살의 가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전을 기원한 염원이 담겨 있다. 그 흔적을 덮지 않으려 기둥과 벽체에 덧칠을 하지 않는다.
대조루 옆 종루에도 슬픈 역사가 담겨 있다.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종은 중국 범종이다. 철(鐵)로 주조한 이 범종은 높이 약 164cm의 크기로 모양새가 거칠고 투박하여 우리나라 종과는 많이 다르다. 명문(銘文)에 따르면 중국 송나라 철종 4년(1097년)에 주조된 중국 회주 숭명사 종이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때 전쟁물자가 부족하자 병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과 한국 전역에서 쇠로 만든 종이나 그릇 등을 닥치는 대로 강제 징발했다. 일제는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에 걸려 있던 범종도 강제 징발했다. 인천항에서 배로 실어 나르기 위해 부평에 있는 군기창에 쌓아놓았다가 전쟁에 패하면서 그대로 눌러 앉았다. 부평 군기창에 방치돼 있던 범종을 전등사로 옮겼다.
고통 받는 중생이 번뇌에서 벗어나게 깨달음을 주는 범종을 녹여 사람을 죽이는 총알로 쓰려했으니 그 업보를 어떻게 감당하려 했을까? 한국 종도 중국에 갔다. 고려인으로 몽골의 황후가 된 기황후가 금강산 장안사에 조성한 종이 일제에 의해 징발돼 현재 중국 뤼신 박물관에 보관 돼 있다.
불교는 온갖 억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역사를 지켜냈다. 단 한 곳도 훼손과 침탈을 용인하지 않았다. 월급 받는 수직관원은 도망갔어도 스님들은 승병을 조직해서 끝까지 싸우고 지켰다. 일제가 빼앗아간 남은 실록도 되찾아왔다. 스님들은 어쩔 수없이 사고를 지키지 않았다. 내 것이라고 여겼다.
출가 수행자는 왕이든 정승이든 이름 없는 백성이든 모두 감싸고 제도해야 할 중생이기 때문이다. 선원전을 품어 천불전으로 삼은 안국사처럼, 경내의 한 전각으로 여기는 전등사처럼, 영감사 일원으로 여기는 월정사처럼 이제 사고는 사찰과 하나다. 조선실록 보관 역사를 알고 사고사(史庫寺)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이유다.
[불교신문3661호/2021년4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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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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