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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천 섬 기행] 전등사의 약사전과 명부전 - 인천투데이 20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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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1,347회 작성일 20-11-1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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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천혜의 요새 삼랑성과 전등사(6)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 사찰 건물에서 부처님과 보살을 모신 건물을 전(殿)이라 하고, 산신이나 칠성 등을 모신 건물을 각(閣)이라 한다. 전등사에는 많은 건물이 있는데 용도에 따라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건물이 많아 전각을 중심으로 전등사를 한 바퀴 둘러보자.

전등사 약사전.전등사 약사전.

보물 제179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대웅보전에서 서쪽으로 향노전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이 있다. 약사전에 관한 기록은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없기 때문에 창건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건축양식이 대웅보전과 매우 흡사해 1621년에 대웅보전이 새로 지어질 때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약사전의 기단은 자연석과 장대석을 함께 사용한 혼합식으로 돼있는데, 남쪽인 정면은 장대석을 연결해 전체를 계단으로 만들었다. 양 측면은 자연석 막돌로 허튼층쌓기를 했는데 돌 사이 틈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건축에 사용하던 삼화토(三華土, 석회와 흙, 푸석돌이 들어간 흙을 섞어 만든 재료로 시멘트보다 강도가 높음)를 바른 것 같다. 기단 상부의 가장자리는 장대석으로 돌렸으며 나머지는 강회로 마감했다.

주춧돌은 대웅보전과 마찬가지로 모두 자연석으로 놓아 기둥밑동을 돌에 맞춰 깎는‘그렝이질’ 기법을 사용했다. 기둥은 민흘림기둥(기둥의 직경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커짐)과 배흘림기둥이 혼재돼있고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했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건물의 정면에 있는 창호는 칸마다 모두 2분합으로 빗살문을 달았다. 그 외의 세 벽면에는 창호 없이 벽체로 마감했다. 약사전 정면은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올려 다포양식을 하고 있지만 공포를 간략하게 올렸기에 창방만 올리고 평방은 설치하지 않았다. 측면과 뒷면은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특이하게 기둥과 기둥의 중간에 장혀를 받치는 화반(花盤, 기둥 사이를 가로지른 나무 위에 놓여 위의 가구재를 받치는 부재로 가장자리에 꽃모양을 새긴 것에서 유래)을 설치해 공포를 대신했다.

지붕의 뼈대를 이루는 서까래는 부연을 달아 겹처마 형태를 보이며, 처마 끝에 올린 기와는 막새기와로 마감했다. 지붕의 형태는 팔작지붕으로 돼있지만 웅장하게 보이기보다는 대웅보전을 그대로 축소한 듯 아담하게 보인다.

약사전 현황탱, 후불탱, 석불좌상.(왼쪽부터)약사전 현황탱, 후불탱, 석불좌상.(왼쪽부터)

사전 내부 인천시 유형문화재들

약사불은 중생을 육체적 병고에서 구제하고 이름 없는 병까지도 치유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이다. 약사전 내부에는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7호인 ‘전등사 약사전 석불좌상’을 모셨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제작된 것으로 통돌로 만든 화강암 석불이다.

그런데 약사불의 수인(手印, 부처나 보살의 서원을 나타내는 손의 모양)을 보면, 두 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손바닥을 위로 하고, 왼손 위에 오른손을 포갠 다음 중지를 구부려 맞대고 엄지의 끝과 닿게 한 상품중생의 아미타 수인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이라고 해야 하는데 약사불이라 부른다. 혹시 약사전에 봉안돼있어 아미타불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아미타 수인으로 나중에 보수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20년 전쯤 전등사에서 우연히 1909년에 찍은 약사전 불상 사진 등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처럼 금박으로 개금하기 전 모습을 찍은 흑백사진이지만 돌의 질감이 잘 드러나 있고 수인을 한 중지 손가락으로 약합(藥盒, 약을 담는 그릇) 같은 것을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볼 때 아미타 수인을 취하고 있지만 약사불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얼굴에 날렵한 호선의 눈썹과 수염을 그려 넣었는데 개금한 현재 불상보다 더 정감이 가는 모습이었다.

현재 약사불의 모습을 보면 머리와 육계는 구분이 분명하게 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둥글고 큰 나발(螺髮)이 뚜렷하게 보인다. 얼굴은 통통한 편이고 반쯤 뜬 것 같은 작은 눈에 코는 원통형으로 곧게 뻗어있으며 입가에는 살짝 웃음을 띠고 있다. 두껍게 표현된 법의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으로 무릎 아래까지 내렸다. 옷 주름은 대체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했는데 아마도 돌에 조각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법의의 앞은 크게 U자형으로 늘어져 젖꼭지를 내놓고 있다. 하반신 양다리 사이 앞으로는 부채 형태의 주름을 새겼다.

약사불의 모습은 오히려 1884년(고종 21) 혜과 스님이 그린 ‘약사전 후불탱(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4호)’에 잘 나타나있다. 화폭 중앙에 두광과 신광을 표현한 약사불좌상과 좌우에는 협시인 일광ㆍ월광보살을 배치했다. 주존불인 약사불은 오른손을 가슴 위로 들어 손가락을 펴고 있으며, 발 위에 올려놓은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불의 전형적인 수인을 취하고 있다. 상하좌우 네 모퉁이에는 사천왕을, 약사불 뒤에는 가섭과 아난을 그려 넣었다.

약사불 왼쪽 벽에는 ‘약사전 현황탱(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3호)’이 놓여있는데 약사전 후불탱과 같은 연도에 만들어졌다. 현왕은 죽은 후 3일 만에 망자를 심판하는 왕으로 명부(冥府)를 주재하는 시왕 중 염라대왕을 의미한다. 현왕탱은 염라대왕인 현왕과 그 권속들이 재판하는 모습을 간략하게 그린 것이다. 화면 구도는 현왕을 크게 그리고 판관ㆍ녹사ㆍ동자 등을 둥글게 배치했으며, 현왕을 비롯한 모든 존상은 얼굴 방향을 제각기 달리한 채 자연스레 서있는 모습이다.

약사전 우물천장에 그려진 연꽃과 덩굴무늬, 대들보 위로 용 얼굴을 조각한 충량.약사전 우물천장에 그려진 연꽃과 덩굴무늬, 대들보 위로 용 얼굴을 조각한 충량.

약사전 내부 볼거리

약사전 내부 우물천장에는 화려한 연꽃무늬와 덩굴무늬, 내부 장혀에는 비천상들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대웅보전보다는 간략하지만 천장에 연꽃과 물고기 조각도 새겨놓았다. 두 대들보에는 대웅보전과 마찬가지로 용의 얼굴을 조각한 충량이 걸려있다.

특이한 것은 내부 창방에 쓴 글씨들이다. 사찰 의식에 사용하는 도구 중 패(牌)라는 것이 있는데, 부처 또는 보살의 이름이나 소원하는 내용을 명패(名牌)에 적어 불단 위나 불상 앞에 봉안한다. 이를 불패(佛牌)라고도 하는데 보통 연꽃으로 장식한다.

약사전 창방에 적혀있는 축원문 ‘왕비전하수제년’(위)과 ‘세자저하수천추’(아래).약사전 창방에 적혀있는 축원문 ‘왕비전하수제년’(위)과 ‘세자저하수천추’(아래).

일부 사찰에서는 왕실의 안녕을 위해 주상ㆍ세자ㆍ왕비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패 3점을 모시는데, 전패(殿牌)ㆍ원패(願牌)ㆍ삼전패(三殿牌)라 한다. 불패와 달리 왕을 상징하는 용과 봉황, 모란 등으로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명패 부분에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세자저하수천추(世子低下壽千秋)’,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라는 발원문을 적는다.

전등사는 이런 전패를 모시지 않고 약사전 내부 좌우 화반 밑 창방에 내용만 적었다. ‘삼전축원문(三殿祝願文)’이라는 이름이 적당할 것 같다. 그런데 ‘주상전하수만세’는 없고, 하나는 희미하지만 ‘왕비전하수제년’이 두 개나 있다. 나중에 적으면서 착각이 일어났거나 전면 창방 어딘가에 적혀있는데 탱화와 촛불을 켠 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지.

전등사 명부전.전등사 명부전.

전등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약사전의 서남쪽에 있는데 창건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러 번의 불사로 위치와 규모가 확대돼 지금의 모습을 갖췄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 형식을 지닌 팔작지붕 집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 심판을 받는 곳을 명부(冥府)라 한다. 명부전에는 이를 재판하는 시왕(十王)을 모시고 있어 시왕전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명부전 조각상들. 가운데 파란 머리가 지장보살이다.명부전 조각상들. 가운데 파란 머리가 지장보살이다.
명부전 조각상들. 인왕상과 뒤로 시왕과 판관, 동자상이 보인다.명부전 조각상들. 인왕상과 뒤로 시왕과 판관, 동자상이 보인다.

내부에는 가운데 지장보살상과 좌우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시왕과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冥府殿)에 딸린 조각상 31구가 있는데, 이것들은 통째로 보물 제1786호로 지정돼있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은 조성원문으로 1636년(인조 14)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웅보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을 조성한 조각승 수연이 중심이 돼 제작한 상들이다.

경전을 보면 지장보살은 전생에 브라만 집안의 딸로 태어났는데 불교를 비방하는 어머니를 위해 헌신적으로 기도함으로써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출했다고 한다. 이때 본 지옥의 끔찍함 때문에 육도(六道, 하늘ㆍ인간ㆍ아수라ㆍ축생ㆍ아귀ㆍ지옥)의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원을 세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죽은 자의 영혼을 모두 구제한 후에 스스로 부처가 될 것을 서원했다.

육도의 중생이 죄를 짓지 않는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지장보살은 결국 자신의 희생으로 부처가 되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중생이 일념으로 지장보살을 찾으면 그 원력으로 지옥을 벗어나게 해준다고 한다.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교가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부분이 지장보살의 모습인 것 같다. 아무리 잘못한 삶이라도 다시 한 번 구제의 기회를 주는 지장보살에게서 인간 구원의 희망을 본다.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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