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문과 성루 종해루
  
▲ 남문 종해루옆 체성 여장
  
▲ 남쪽 여장과 총안 체성
  
▲ 동남쪽 체성 바깥 모습
  
▲ 동문과 남문 사이 총구가 있는 여장
  
▲ 동문에서 북쪽으로 뻗어올라간 성벽
  
▲ 동문에서 산정으로 뻗어 올라간 성벽
  
▲ 동쪽 미복원 성벽 안쪽 전경
국운이 풍전등화이던 구. 한말 조선은 서세동점에 빗장을 단단히 잠근다. 이 무렵 서구 열강은 이양선을 보내며 끊임없이 통상을 요구한다. 이양선은 ‘모양이 다른 배’라는 뜻이다. 상선이었지만 대포를 싣고 섬과 해안을 마구 드나든다. 탐사를 빌미로 수심을 재고 지형을 살피며 다닌다.

고종3년(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에 나타난다. 이 배는 강을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린다. 분노한 평양부민들은 선원들을 죽이고 배를 불태운다. 두 달이 지난 9월에는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점령한다. 자국 선교사들 처형이 그 이유였다. 당시 실권자 대원군은 수시로 이양선이 출몰하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을 단행한다. 1866년 봄 대원군은 마침내 서양문물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붙잡아 처형한다. 병인박해다. 이때 목숨을 부지해 달아난 신부 리델(Ridel)은 청나라로 달려가 극동함대 로즈(Roze)제독에게 알린다. 로즈는 그 해 8월 10일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서해에 나타난다. 그는 1척은 작약도에 정박해두고 2척은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과 서강까지 뱃길을 탐사한 뒤 열흘 만에 물러간다.

프랑스군함을 본 조선은 곧바로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한다. 연안 경비를 강화하고 포수들을 모집해 방어에 나선다. 로즈는 9월 6일 2천 여 명을 이끌고 리델 신부와 천주교도의 안내로 강화도에 상륙한다. 프랑스군은 외성인 강화성을 대포를 쏘아 순식간에 점령한다. 강화성 외규장각 조선왕조 의궤 수 천 권이 이때 약탈당한다.

조정은 이경하를 총사령관격인 도순무사로 임명한다. 그리고 중군 이용희와 천총 양헌수에게 군사를 딸려 강화도로 보낸다. 이용희 부대는 김포 문수산성에 진을 친다. 그러나 이 산성 또한 순식간에 점령된다. 조선군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양헌수가 나선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10월 2일 밤 몰래 강화해협(염하)을 건넌다. 이어 승군 200여 명이 지키는 정족산성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양헌수는 산성에 진을 치고 공격에 대비한다. 로즈는 이튿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곧 바로 공격명령을 내린다. 조선군은 남문과 동문을 중심으로 적이 사정권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오후 2시 적이 공격해오자 양헌수는 일제히 사격 명령을 내린다. 공방전은 30여 분간 지속된다. 그런데 조선군의 집중사격으로 프랑스군 수 십 명이 쓰러진다. 이들은 강화성 전투 승리감에 도취돼 대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천운일까 조선군의 탄약이 다 떨어져 가던 오후 3시 무렵 로즈가 갑자기 퇴각명령을 내린다. 더 이상 전투는 더 많은 사상자를 낼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프랑스군은 강화성으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기로 한다. 그러나 이미 군사들의 사기는 저하됐고 체력은 고갈된 상태였다. 로즈는 더 이상 전투와 주둔은 힘들다고 판단한다. 마침내 20여 일 만에 함대를 철수한다. 강화도를 외세로부터 지켜낸 두 번째 전투 병인양요의 전말이다.

정족산성은 2011년부터 삼랑성이라고 불린다. 단군 왕검의 아들 셋이 축성해 삼랑성이라고 불렀다는 옛 기록에 따른 것이다. 초기 형태는 토성이었다. 축성 시기는 불문명하다. 다만 고려 조정에서 1259년 산성 안에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이로 미뤄 그 이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형적인 삼국시대 성곽 구조여서 삼국시대 쌓고 고려, 조선 때 수축했던 것이다. 조선조 영조15년(1739년) 재축성은 분명한 기록이 있다. 이 과정에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는 편액을 단다. 현종 1년(1660년) 마니산 사고 조선왕조실록을 정족산사고로 옮긴다. 왕실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도 이때 짓는다. 오늘날 두 건물은 사라지고 전등사만 남았다.

산성은 경기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세 봉우리와 계곡에 걸쳐 있다. 해발 222m 정족산은 마니산 세 봉우리 가운데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다. 산의 형상이 마치 다리가 세 개인 솥처럼 생겼다. 산성은 이 산의 동쪽을 감싸고 있다. 답사는 남문 종해루나 동문에서 시작한다. 어디든지 마찬가지 한 바퀴 돈다. 고찰 전등사가 산성 안에 있다. 승군이 주둔하며 산성을 지켰다는 옛 절이다.

체성 따라 동문 방향은 회곽도가 가파르다. 체성위로 사람 허리 높이 여장이 이어진다. 여장은 전투 때 병사가 몸을 숨기는 담장이다. 여장은 동문과 남문이 만나는 장대 터까지 이어진다. 모두 총안(총과 포를 쏘는 구멍)과 타구(여장과 여장사이 빈 공간)를 갖추었다. 여장은 남문과 동문, 남문과 서문 사이에만 있다. 가파른 성벽위라 마치 계단처럼 보인다. 여장은 동문이나 서문, 북문 인근에는 없다. 가파른 산세가 자연방어망을 형성한 덕분이다. 체성 밖은 산을 깎아낸 자리에 성 돌을 덧댄 수직벽이다. 붕괴를 막기 위해 할석을 성돌 사이에 끼워 넣기도 했다. 고대 산성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축성방식이다. 외부 수직 벽이 매우 높다. 여기다 산세가 가팔라 적이 기어오르기 어렵다. 동문은 문루가 없고 홍예만 있다. 그런데 구운 벽돌을 마치 홍예처럼 갖다 붙였다. 홍예는 보수 흔적이 뚜렷하다. 벽돌대신 홍예석을 무지개처럼 보수했으면 좋을듯하다.

동문 바로 안에 양헌수 장군(1816∼1888) 승전비각이 있다. 프랑스군을 물리쳐 한성부윤, 어영대장과 금위대장을 지낸 인물이다. 1876년 일본이 운요호사건을 일으키고 강화도 조약을 요구하자 앞장서 반대한 그는 당대 유학자 화서 이항로 문인이다.

동문에서 북문까지 체성은 마치 용틀임하듯 길게 산정으로 이어진다. 밖에서 기어오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높이가 사람 키를 뛰어넘는 4∼5m 남짓이다. 높은 성벽은 10m가까이 되기도 한다. 위쪽 성벽의 폭은 1m가량이다. 이런 형태 체성은 북문까지 이어진다. 모두 산을 깎아내고 벽을 쌓은 뒤 돌과 흙을 채우는 내탁식 성벽이다. 북문은 암문을 연상시키는 사각형이다. 끊어진 체성과 체성 사이에 장대석을 얹고 그 위에 잡석을 얹었다. 성문 분류상 평거식으로 볼 수 있다. 문루 존재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북문을 지나면 정상이다. 망대 터로 추정되지만 아무것도 없다. 이어 서문까지 성벽이 이어진다. 북문과 서문사이에 치성이 있다. 치성이라기보다는 길게 뺀 용도처럼 보인다. 성벽 일부를 길게 빼내 양쪽에 여장을 쌓은 방어시설이다. 산세 따라 쌓아 뱀처럼 구불구불하다. 성벽위에서 발아래를 본다. 가파른 경사지에 체성마저 높아 아찔한 현기증이 든다. 정상을 지나 만난 서문도 홍예문 양식이다.

그런데 이 성문도 홍예를 벽돌로 보수했다. 성문이라기보다 하천에 놓은 홍교를 닮았다. 서문에서 남문까지는 구불구불한 체성을 타고 하산하는 길이다. 지대가 점점 낮아진다. 남문이 보이는 지점에서 성벽위에 계단처럼 여장이 등장한다. 오른쪽 멀리 강화해협이 조망된다. 왼쪽 아래 전등사가 보인다. 남문 종해루는 사찰 입구에 해당한다. 1976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문루와 성벽이 볼수록 웅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