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무소 ...불광불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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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09회 작성일 06-01-20 11:49본문
인간 황우석.... 11년전...(서울대신문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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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송아지 특허 내지 않고 농민들에게 무료 전수하겠습니다 ;
서울대 소박사 황우석교수 [복제송아지] 특허내지 않고 농민들에게 무료 전수하겠어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황우석교수(55).2006년 현재 연세입니다. 1995년 연세가44세입니다.
* 본래 기사 원문 나이가 44세 입니다 11년 전 기사라는 이야기입니다. 현재 황우석 박사님의 연세가 55세입니다. 1995년 수정란복제송아지 기사였던 것입니다. 이내용 정정하여 올립니다.
너무 중요한 사실을 제가 기사를 끝까지 제대로 안 읽은듯해서 올립니다 10년전 황우석 박사님이 어떠한 여건에서 연구를 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사를 쓰신 이효재기자님의 원문기사는 찾을 수 없지만 너무나 황우석 박사님에 대하여 잘 알려준 기사인 듯 합니다. 이 기사는 최근에 쓰여 진 기사가 아닌 1995년도에 쓰여 진 기사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 없으시길 바라며 정정하여 올립니다. *
8년 반 동안의 끈질긴 집념으로 그는 지난 10일 경기도 이천군의 한 작은 농장에서 복제(핵이식)송아지를 탄생시켰다. 육질과 유질이 뛰어나고 유량도 풍부한 고능력소(수퍼소)에서 채취한 수정란을 복제해 이를 대리모(수란우)에 이식, 수펴송아지 [1호]를 받아낸 것.
세계 기록으론 이미 성공한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 번째. 앞으로 실험을 보완, 실용화 단계에 오르면 1개에 1백만∼4백 만 원 이나 되는 수입수정란을 1만∼2만원에 자체 생산할 수 있어 연간 8천억원의 수입 대체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그는 전망했다. 현재의 젖소는 하루평균 젖 18㎏을 생산하나 복제 젖소는 35㎏을 생산하고, 우유생산량을 적정수준에 묶어두면 사육두수를 2배정도 줄일 수 있어 생산성은 3∼4배 정도 높아지게 된다. 우유도 지방의 함유량이 현재 3.4%에서 4%이상으로 높아져 고품질화 된다. 한우도 현재 1마리에서 4백50㎏의 고기가 생산되나 복제 한우는6백㎏으로 늘어나고, 송아지 생산단가를 현재 두당 1백60만원에서 70만원으로 낮출 수 있다.
그는 이번 실험으로 {축산농가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곧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소 항문검사만 30만 번 이상 그에게 소라는 동물은 연구대상을넘어 오늘의 그가 있게 한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거칠게 하면 성격이 한없이 포악해지고, 애정으로 대하면 한없이 유순해지는 소는 마치 우리나라 순수한 농민들과 같아요.}
그에게 소는 곧 농민과 같은 존재다. 그가 평생을 소 연구에 바치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52년 충남 부여군 은산면의 벽촌에서 6남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6살 때 돌아가신 뒤 홀어머니 ( 조용련·현재 77세)밑에서 어렵게 자라났다. 어머니는 1천 여 평의 논밭과 한우 3마리로 자식들을 키웠으나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다. 때문에 다른 형제들이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가 대학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대전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친척 한분이 {누군가는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그를 대전으로 데리고 가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대전서중을 거쳐 대전고를 졸업했다. 고교 선생님들은 그에게 서울대 의대진학을 권유했지 만 그는 아무 주저없이 서울대 수의과에 지원, 72년 합격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우리 식구를 먹여살린 소에 대해 언젠가는 보답을 해야 한다고 쭉 생각해왔어요. 방학 때 집에 내려가면 어머니가 논두렁에서 꼴을 만들어 지게에 가득 싣고 소에 먹이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어요. 지금도 힘들 때마다 그 모습을 생각합니다.} 또 소의 눈에서 한없이 어질고 평안한 모습을 보라보면 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전공과정이 시작된 2학년부터 그는 그 흔하던 미팅 한번 해보지 않고 도축장이나 가축병원에 드나들면서 소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어 장기를 만져 소의 상태를 진단하는 [직장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해외출장 때를 제외하고는 최소 1주에 2∼3번씩은 [직장검사]를 한다. 지금까지 30 만 번 이상했다. 전국에서는 그보다 많이 소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어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는 {손끝의 감각이 무뎌지지 않게 하기 위해 직장검사를 계속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그가 소의 자궁에 수정란을 집어넣어 수태에 성공시키는 확률은 평균 63%로 세계적인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평균 30% 수준이고, 미국과 일본에서도 평균 50∼60%를 넘지 않는다.
그는 학교를 다닐 때나 박사과정을 마치고 4년 동안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는 동안 전국의 3 백 여 개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소를 만지고 실험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에 있는 그의 집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농민들로부터 {우리 소가 아프다}는 구호전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때마다 그는 싫은 소리 한마디 않고 달려가 소를 진단하고 병을 고쳐준다. 그래서 그는 소를 기르는 축산농가들 사이에 {소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불리고 있다. {황우석을 모르면 간첩}이라고도 한다.
이 같은 평가에 대해 그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단호하다. {우리는 응용과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연구실 연구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어요. 농민들의 농장은 그자체로 훌륭한 살아있는 연구실이지요. 소똥도 소중한 자료입니다.}
그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와 그의 식구들을 먹여 살렸던 사람들도 다름 아닌 이 농민들이었다.
그는 85년 7월 서울대 수의대학 학장이던 정창국교수로부터 {세계적 학문조류인 수정란 이식을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가나가와 히로시교수가 있는 일본 북해도대학으로 갔다. 그는 이 대학에 서 10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이 기간동안 평소 그를 알고 있던 농민 10여명이 부인과 어머니, 두 아들이 살고 있는 서울 집으로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일본에 있는 그에게도 생활비의 일부를 보내주었다. 이들은 아무 말도 없이, 아무 대가도 없이, 그냥 그가 좋아서 매달 5만∼10 만원 씩을 통장에 넣어 주었다.
그는 {이렇게 무조건으로 나를 도와준 농민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나도 무조건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그는 어떤 때는 하루에 2∼3시간만 자며 연구를 했다. 당시 같은 연구실에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에서 온 유학생이 12∼13명 정도 있었는데 다들 그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가나가와교수도 그의 성실성과 집념에 반해 유학생중 유독 그만을 일본의 목장이나 연구소에 직접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실습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가나가와교수는 지금도 그가 일본에 출장가면 부부가 공항까지 나와 맞이하고 일본 유명 학자 등을 자기 집에 불러 잔치를 벌여 줄 정도로 그를 아끼고 있다. 일본의 축산 현장에서 그는 {결국 기계화로생산성을 높이고 첨단기술을 접목시키지 않으면 우리 농촌은 살아남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학기 중이던 86년 5월 그의 사람 됨됨이와 실력을 아껴오던 정창국학장은 당시 박봉식총장에게 탄원, 그 어려운 교수 자리를 하나 따내 일본에 있던 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를 서울대 수의과 교수로 발령을 냈다.
연구 중 중병 얻어 [시한부 인생] 되기도 복제송아지를 만들어야겠다는 꿈은 그의 귀국 비행기 안에서 잉태됐다. 당시는 세계의 축산학계에서 달성되지 않은 연구과제에 불과했고, 성공가능성도 미지수였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비행기 안에서 [내가 복제 송아지 연구를 시작해 놓으면 내 뒤를 이어 누군가 성공하겠지]라는 막연한 꿈을 꾸었습니다. 성공하려면 20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생각했어요. 당시 세계적으로 막 논의가 시작된 우루과이라운드를 생각해보니 복제송아지만이 우리 축산농가들이 살아갈 길이라 생각했어요.}
귀국 후 9월부터 시설도 형편없고 변변한 시료도 없는 수의과연구실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일단 복제송아지의 기초단계인 쌍둥이송아지 만드는 연구를 시작했다. 대리모에 수정란 2개씩을 넣어 수태시키는 비교적 가벼운 연구로 일 년 만에 성공했다. 다음 단계로 시험관송아지 연구가 시작됐다. 이 시험은 죽은 고능력 소에서 떼어낸 난소에서 미성숙난자를 뽑아내 24시간동안 시험관에서배양, 성숙 난자를 만들어 정액을 넣어 수정시킨 뒤 체외에서 5일동안 배양시켜 정상 수정란을 만든 다음 대리모에 이식시키는 것. 죽은 소 1마리에서 수정란 60개정도를 얻어낼 수 있다. 고 능력소 (수퍼 소)에서 채취한 수정란 1개로 실험실에서 수정란을 무한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복제송아지와는 이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는 6년간의 연구 끝에 93년 11월 시험관송아지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시험관송아지연구는 그대로 복제송아지 연구의 밑받침이 돼 1년4개월 뒤 복제송아지연구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연구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88년 6월에는 소화기 계통에 중병을 앓아(그는 병명을 밝히기를 꺼려했다) 서울대병원에서 6개월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았다. 연구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8시간에 걸친 대수술과 {실험을 게속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그의 투혼으로 기적 같이 살아났다.
그해 7월부터는 서울 잠원동에 있는 도장에서 {나 자신과 투쟁하고 나 자신과 대화를 하자}며 단전호흡을 시작했다. 매일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1시간40분동안 한다. 지금까지 해외출장기간을 빼놓고 단 하루도 빠진 적이 없다. 단전호흡이 끝나면 수원에 있는 대학연구실로 출근, 바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그는 대부분 하루 2끼를 먹는다. {연구실, 강의실, 농장을 돌아다니 다보면 밥 먹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 이유다. 귀가시간은대부분 밤12시. 이 때문에 그는 하루에 4시간이상 잠을 않잔다. 그는 학부생들에게 {나 만큼만 성실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욕하지 않는다.
그와 함께 있는 연구원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연구원들에게는 토요일, 공휴일은 물론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없다. 연구의 특성상 연구실을 24시간 지켜야 하고 매일 3∼4명은 밤을 새워야 한다. 연구원들에게는 별도의 보수도 없었다. 오히려 출장비 연구비 등을 자기 돈으로 들여가면서 해왔다. 결혼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매년 5천만∼2억원의 연구비를 대려면 이들에게 돌아갈 돈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연구원들은 부인들에게 생활을 맡겨야만 했다.
우리의 연구 결과는 모두 농민들의 것 황교수는 연구를 시작하면서 어렵게 마련했던 자신의 32평짜리 아파트를 팔아 몽땅 연구실기자재를 구입하는데 사용했다. {빈약한 학교에서는 아예 연구비를 탈 엄두도내지 못했고, 연구가 시작되고 상당히 진행됐을 때까지도 이 연구에 관심을 가진 기업이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황교수가 정부로부터 유전공학연구비로 연간 5 백 만 원을 받았던 것이 고정적인 수입이었고, 가끔씩 일부 중소 축산기업들이 도와주었다. 봉급을 몽땅 털어 넣기 일쑤였다. 비싼 시료가 필요하면 선배들이 있는 회사로 달려가 손을 내밀기도 했다. {연구비가 풍요로 왔다면 오히려 연구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아니라 농민들을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연구를 유지해왔습니다. 실험에서 수 없이 실패했지만 연구원들은 그때마다 [연구는 반드시 성공시키되 대가는 바라지 않는다]는 다짐을 되새기며 극복해 나갔습니다.}
이연구실 출신이 50여명에 이르지만 단 한마디의 불평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황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복제송아지 생산 사실이 보도되자 대그룹을 포함한 10여개의 축산회사로부터 자본을 댈 테니 특허를 내고 독점생산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며칠 전 {그동안 무관심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농림수산부의 한 간부에게 {우리는 결코 특허를 내지 않는다. 축산농가들에게 무료로 우리의 기술을 전수해주고 원하는 농가마다 수정란을 이식해주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우리가 얻어낸 연구결과는 모두 농민들의 것 }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연구실에는 요즘 하루에 5∼10건씩 농민들로부터 복제송아지 이식을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그는 일요일이던 지난 19일에도 연구원들과 함께 복제송아지 이식을 위해 하루종일 농장을 돌아다녔다. 그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뒤 한 일간지에서 [음지에서 이룩한 개가에 갈채를 보낸다]는 문구를 읽었을 때 코끝이 찡했다고 했다. {우리 연구원들은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더 이상 요구할 것은 없습니다.}
앞으로 그는 복제송아지의 무게를 현재의 60㎏에서 45㎏으로줄여 난산에 따른 사산을 방지하고, 체외배양 능력을 향상시키는 보완연구를 할 예정이다. 3∼4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이는 이 보완연구가 끝나면 곧바로 복제송아지의 산업화가 시작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는 인체에 필수적인 인슐린 인터페론 락토페린 등 생리활성물질을 소의 젖에서 대량 분비되도록 하는 연구에 들어갈 예정이다.
황교수는 1호 복제송아지가 태어난 지난 10일 새벽 충북 보은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전했다. {내 아들 장하다}고 울먹이는 어머니의 말에 그는 {농민의 아들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효재 경인취재본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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