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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무소 [답글] 템플스데이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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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범천 합장 댓글 0건 조회 1,768회 작성일 06-08-0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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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陀行 보살님, 반갑습니다!


傳法華 보살님과 함께 템플스테이( Temple stay)에 동참하시고

고마운 글 남겨 주셨습니다.


더러는 살아가다 많은 말이 필요 없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경계를 만나게 됩니다.


보살님께는 ‘고맙습니다!’라는 말도 번거로운 허물로 느껴집니다.

그냥 든든함만 있습니다. 오랜 시간 내공?을 쌓으신 공덕을 느낍니다.


心佛及生 是三無差別이란 경구가 오랜만에 머리에 맴돕니다.

중생모두가 이 자리를 얻으면 바로 불국토의 세계이겠지요..!!


그만 인사를 드릴려다..


문득 분별(分別)이란 용어가 떠올라

함께 공부지었던 ‘분별 아닌 분별’의 경계?를

보살님과의 이차인연(以此因緣)으로, 혹 인터넷을 통해 인연되는 분들을 위해

공부했던 자료를 줄여서 소개할까 합니다.

동국역경원의 역경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미령 님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하였다고 말씀 드렸었죠? 이 기회에 이 위원님께 감사드리며..



..... 마지막으로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는 경계를 짚어 보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그런다면서요? ”,   “예! ”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면 그건 분별하지 말라는 말 아닙니까? ”,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

“그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옳고 그른 것을 분별 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갑니까?  그럼   범죄를 저지른 사람과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을 똑같이 대하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솔직히 우리 모두는 말문이 막힌다.


예전에 반야심경을 함께 공부하는 자리에서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사기꾼이나 도둑도 이 세상에는 다 필요한 사람이란 말이군요. 그들이 있으니 경찰이며 판검사 같은 사람이 먹고 사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사기꾼을 두고 나쁘다거나 경찰을 두고 옳다고 분별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바로 부처님 말씀인 것인가요? ”

이때도 우린 말문이 막힌다. 그러나 막히면 안된다 .. 뚫어야 한다!!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라는 말은 불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쉽게 부담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그래서 ‘왜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합니까!!’라는 질문조차도 분별심에 사로잡힌 수준 낮은 사람들이나 하는 질문이라 생각해서 궁금해 하지도, 궁금해 할 수도 없었던? 것이 불교계의 현실이었다.


과연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가? 그 생각 때문에 生死輪廻하는 것이니 이런 생각조차 일으키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 생각을 할 수 없는 나무나 돌은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니 지금의 나보다 한 단계 더 깊은 경지에 놓여 있는 것일까?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닌 것이다.

그럼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은 이미 내 나름대로의 판단을 가지고 그 가치관을 바탕으로 바깥세상을 받아들이고 분별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그럼 내 감각기관의 기능 자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일까?


만약 내 옆 사람이 아주 끔찍한 일을 저질러서 주변 사람이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때, 그럼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잘 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판단도 하지 말고, 그런 시비를 가리는 사람들을 향해 ‘그대 발밑이나 잘 살펴봐라 ’라고 일침을 주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게 해야 할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을 앞에 두고 ‘너의 행동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분별심을 내지 말라’고 말해야 할까?

자식이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도 분별심인 걸까?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이가 나왔을 때 ‘당신은 지금 잘못하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 또한 분별심을 일으킨 것이 될까?


왜냐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옳거나 그르다는 판단이 내려졌다는 말이니까.


부처님 자신도 막 출가하신 뒤에 당시 이름 높은 수행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가장 완전한 경지까지 도달한 뒤에는 “이것은 궁극의 경지가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들과 헤어지셨다.

이런 행동은 역시 뭐가 옳고 그른지를 세밀하고 냉정하게 따져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인 것이다.


초기 경전인 아함경을 보면 의외로 부처님은 항상 모든 일을 심사숙고하여 선한 일, 선하지 않는 일, 올바른 일, 그릇된 일을 판단하고 나누고 있으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내가 이제부터 설명할 터이니 그것을 고요한 곳에 앉아서 깊이 생각하라 ”는 주문을 항상 넣으신다. 나아가 당시의 다른 종교나 사상의 오류를 예리하게 짚어내어 그들이 왜 착하지 않고 그릇되었는지를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예도 꽤 많으시다.


게다가 과거 일곱 부처님의 그 유명한 게송(七佛通戒)을 보아도 “그 어떤 악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힘써 행하며 그 마음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 이것이 불교다(衆善奉行 諸惡莫作 自靜其心 是諸佛敎)”고 당부하고 계신다. 이런 당부를 실천하려면 가장 먼저 선악과 시비를 바르게 따져야만 하는 것은 기본 중에서도 기본인 것이다.


어떤 경계와 맞닥뜨려서도 일체의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이는 불자들은 이런 의문들은 다 해결하였는가?


어느 날 왕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사람 수십 명을 불러 모았다. 왕은 그들 앞에 커다란 코끼리 한 마리를 끌고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코끼리라는 동물이다.


“자, 너희는 각자 이 동물을 만져보고 나에게 코끼리에 대해서 설명해보아라.”


그들은 한참 코끼리를 더듬고 어루만진 뒤에 한 사람씩 자기가 생각하고 머릿속에 그려본 코끼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폐하, 코끼리는 쟁기처럼 생겼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사람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본 자였다. 그는 아주 예전에 쟁기라는 연장을 꼼꼼하게 만져본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그 옆의 사람이 그를 꾸짖었다.


“무슨 소리 하는 것이요? 폐하, 코끼리는 기둥처럼 생겼습니다.”그는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사람이었다. 그 옆의 사람은 코끼리의 귀를 만지고서 “코끼리는 쌀을 까부르는 키처럼 생겼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 밖의 사람들도 모두 자기가 만진 부분만을 가지고 자기가 알고 있거나 들어두었던 사물에 비유하여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자기의 생각이 옳고 다른 이의 생각은 틀렸다고 고집하며 끝없는 말다툼을 벌였다. (<경면왕경>)


주요 포인트들은 이렇겠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판단하고 결정짓는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문제인 것이다.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더듬은 부분만을 가지고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만 ‘이게 바로 코끼리이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돌아보면 실상 비일비재하다.

자신의 그런 주장이 틀릴 수도 있고 부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내 말이 옳고 내 생각이 맞다’고 고집부리기까지 한다.


게다가 그것이 가장 정확한 생각이라고 섣불리 판단을 내린 뒤에는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이라고 성화를 부린다. 그런데 자기가 이렇게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기거나 남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할 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바탕에는 대체로 자기의 이익이나 명예욕이 깔려 있기가 쉽다.

그래서 남이 자기를 따라주면 기뻐하고 우쭐대지만, 자기를 따라주지 않으면 원한을 품거나 서운해 하거나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욕심을 덜어내지 못하고, 사물이나 사건에 흐르는 인과의 법칙과 인연의 법칙을 모르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 잣대로 세상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헤아리고 판단하고 그에 다투는 것을 사량분별, 분별심, 망상이라 부른다. 우리가 버려야 할 분별심은 바로 이런 어리석음욕심을 바탕으로 인하여서 일어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옳다, 그르다, 밉다, 곱다, 착하다, 못됐다 … 하는 이런 상대적인 생각을 내지 말라는 말이라는 대답도 한다.


자기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욕심을 덜어내지 못하고 사물이나 사건에 흐르는 인과의 법칙과 인연의 법칙을 모르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 잣대로 세상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헤아리고 판단하고 그에 다투는 것을 사량분별, 분별심, 망상이라 부른다. 우리가 버려야 할 분별심은 바로 이런 어리석음욕심을 바탕으로 인하여서 일어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은,

첫째 - 혹이나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가장 먼저 그 일을 대하는 자기 마음속에 사리사욕이 없는 것이고,

둘째 - 그 일을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통괄하여 바라보는 것이며,

셋째 -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가장 정확한 원인과 그 일을 둘러싼 인연들을 동시에 파악하라는 뜻인 것이다.


아무런 생각이나 판단도 내리지 말라거나, 더구나 사기꾼의 행동과 경찰의 존재를 똑같다고 보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공부, 수행 ’이라는 여과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참 智慧를 증득한 사람은 위의 첫째, 둘째, 셋째 항목의 공부를 마쳤기에 八正道 正見 바탕으로 한 올바른 분별의 힘을 증득하였으므로,


분별을 하되,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닌 ‘분별아닌 분별’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사량분별)하되, (봄)하는 것이며, 사리사욕이 없이

일어난 현상을 보고, 느끼고, 즉각 無分別後得智證得바탕에서 是非를 마음의 동요 없이, ‘너 나의 이해득실과 관계없이 고요히 하는 것일 뿐 ’이라는 것이다.


큰 틀 -더불어서 함께 사는 공동체인 삶 전체를 관통한 분별 - 을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이런 공부를 마친 이를 전문용어로 無分別後得智證得한 사람이라 한다.) 불교수행은 이 자리를 얻기 위한 것이며 이를 얻은 이는 眞人(참사람)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대함에 있어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떠나 無分別後得智證得한 사람.. 그는 가장 자유롭고 위풍당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본 것이나 들은 것 속에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있다고 보면서 그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다른 것은 하천한 것이라 보는 어리석은 사람.. 착하고 건전한 사람들은 그것을 속박이라고 말한다.


본 것이나 들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고 당파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피안으로 건너간다.”라는 <숫타니파타>의 노래처럼, 속박에서 풀려났기 때문이다.


속박에서 풀려난 사람은 분별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가치기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칭찬이나 비방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이미 자기 마음속에서 욕심과 성냄을 벗어버렸고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모든 일들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 말은 無分別後得智證得한 사람의 봄()으로 대체하여 이해한다) 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되고 싶어 하는 참자유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늘 어렵고 헤매는 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법사스님에게 세상의 절반은 ‘왜 하필이면 지금 그런 말을 해! 하는 분별심이 일어날 것 ’이라는 것이다.

분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분별을 해야 되고, 위의 글처럼 부처님께서도 냉엄히 분별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자 이쯤 되면 분별에 대한 문제는 화두처럼 자기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지금 법사스님의 분별에, 분별 아닌 분별이라고 누가 박수를 쳐줄지! 스님! 그런 분별부터 놓으세요!!..? 라고 화를 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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