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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금강심 댓글 0건 조회 2,224회 작성일 06-09-1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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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의 아들이 쌓은 城
천년고찰 전등사에 들어가려면 성문을 지나야 한다. 무심코 그 성문을 지나는 순간 우리는 수 천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삼랑성에 들어서면 신화(神話)와 역사(歷史)가 교차한다. 축조 연대를 알 수 없는 아득한 시간에 단군은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소에게 삼랑성(三郞城)을 쌓게 했다.
삼랑성은 정족산성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성곽이 있는 산 이름이 정족산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220m의 정족산(鼎足山)은 큰 산봉우리가 마치 세발 달린 솥처럼 보인다고 해서 ‘솥정(鼎)’자에 ‘발족(足)’ 자를 쓴 것이다. 강화도의 주봉인 마니산의 한줄기가 북동쪽으로 뻗어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다시 세 봉우리를 만들고 있는 산이 정족산이다.
삼랑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해 능선을 따라 지은 성으로 길이가 2,300m이며 동·서·남·북문이 있다. 성벽 높이는 3m에서 5m까지 이르는데 곳곳에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성벽은 실제보다 아득하게 느껴진다.
 

# 천년고찰을 품은 城
성(城) 안에 너무나 유명한 절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작 그 사찰을 가슴에 품고 있는 성의 존재를 잊고 있는 듯하다. 삼랑성 기행은 성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홍예돌문인 동문부터 시작해 남문-서문-북문으로 이어진다. 성돌이 기행은 전반적으로 완만한 길로 이어져 있어 가벼운 트래킹 수준이지만 서문과 북문 사이의 일부 구간은 등산이라 할 정도로 오르내림이 심하다.
출발점 동문 옆으로 이어진 달맞이 길로 접어들면 바로 숲속 기행의 맛을 느낄 정도로 나무가 우거지다. 회색빛 성곽을 가이드삼아 산길로 오르면 어느새 마을과 논이 발아래 놓이고 육지와 섬을 갈라놓는 염하의 물줄기가 눈앞에 보인다.
삼랑성은 미끈한 다듬돌이 아닌 산 속에 굴러다니는 막돌로 주춧돌 삼고 쐐기돌을 박아 축조되었다. 단군시대에 쌓았던 성이 세월의 무게에 눌려 무너져 내리면 삼국시대에 다시 쌓고 풍파에 시달려 또 무너지면 고려, 조선에 다시 쌓으며 지금까지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이다.  
동문에서 약 250m 오르내리면 번듯한 문루가 세워진 남문을 만나게 된다. ‘종해루’라는 현판이 달린 남문 덕분에 그나마 삼랑성은 성으로서의 자태를 뽐낼 수 있다. 남문을 거쳐 다시 산길로 접어들면 이제 웬만한 곳은 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지대가 높아진다.
불쑥 솟은 바위에 오르니 사바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에 창건된 전등사 도량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고즈넉하게 내려다 보인다.

 

# 역사를 지킨 城
성은 방어체계의 근간이다. 삼랑성은 강화남부와 김포반도 그리고 인천까지 이어지는 해양방어망의 핵심 역할을 해왔다. 한때 이 성에서도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종 3년 (1866년) 프랑스 함대 올리비에 대령은 프랑스군 160명을 이끌고 동문과 남문을 공격해 왔다. 양헌수 장군의 통솔 아래 조선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프랑스군을 패퇴시킨다. 이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10년(1873)에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동문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세워졌다.
서문은 앞의 두 문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사람들의 통행도 거의 없어 문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하다. 서문을 거쳐 산길로 오르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면 정족산 사고(史庫)가 나온다.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정족산사고인 장사각이 지어졌다. 현재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 현판도 함께 걸려있다. 보관돼 있던 실록과 족보는 현재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지금이나 당시나 정족산은 물이 한번 막고 성곽이 한번 막는 천연요새로 귀중한 실록을 숨기기에 적합한 듯하다.
다시 성곽 길로 접어들어 북문으로 향한다. 정족산의 최고봉에 서니 강화의 남단이 눈에 들어온다. 단군의 전설을 간직한 마니산의 영봉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단군의 세 아들은 참성단에서 정성껏 하늘에 제를 지낸 후 지척에 있는 정족산으로 건너와 각자 한 봉우리씩 맡아 천년 요새 삼랑성을 세웠으리라. 
북문도 서문처럼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홍예돌문이다. 북문 성곽길에서는 길정저수지, 고려산, 석모도… 멀리 개성 송악산의 자태도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시야가 좋다. 동문에서 출발해 남문, 서문, 북문을 거쳐 다시 출발점 동문으로 돌아왔다. 짧은 시계바늘이 2칸을 지나 있었다. 선사시대, 삼국시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다시 현재까지의 여정을 두 시간 만에 끝낸 것이다.


城邑도시 강화

강화도는 우리나라 역사의 수난기 때마다 피난처 역할을 하거나 국난위기 때마다 최전방 방어막 혹은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한 지역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강화도 뿐만 아니라 교동읍성 등 주변 섬에도 성(城)이 구축돼 있다.
강화도의 대표적인 성, 강화산성은 강화읍을 휘돌아 감싸고 있는 길이 7,122m 석성(石城)이다. 고려 고종 때 강화도로 천도한 후 대몽항쟁을 계속하기 위해 각 도의 장정들을 선발하여 처음에는 토성으로 쌓았다. 먼저 강화읍 북산에서 선원면까지 내성(內城)을 쌓았고 이후에 해안선을 따라 외성(外城)과 내성 수비를 위해 중성(中城)을 축조했지만 몽고의 요구에 의해 다 헐리게 된다. 강화산성은 1710년(숙종36)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어 서문, 남문, 북문, 석수문 등이 남아있다. 강화군청에서 추천하는 산성기행코스는 강화산성남문 ▷ 남산약수터 ▷ 석수문 ▷ 연무당옛터 ▷ 서문 ▷ 북문 ▷ 오읍약수터 ▷ 고려궁지 ▷ 김상용선생순절비 ▷ 용흥궁 ▷ 토산품판매장 ▷ 풍물시장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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