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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 2010년 5월 초하루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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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468회 작성일 10-06-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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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 5월 초하루 법문(2010. 6. 12)

자 합장하시기 바랍니다.

반야바라밀 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오늘은 하안거 결재를 하고 첫 번째 맡는 초하루입니다. 오늘은 ‘시작과 마지막’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초하루입니다. 초하루라는 것은 처음이라는 뜻이죠? 사실 모든 것이 처음이죠. 끝이 있습니까? 끝이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처음과 끝을 함께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된 것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존재들은 현재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변하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변하는 것을 느낍니까?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보니까 변해있다는 것이지 변하는 순간순간은 알 수 없습니다. 매 순간 변화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분은 부처님입니다. 현재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존재방식과 그들의 시원을 아시는 분,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똑 같이 ‘시작 한다’고 해놓고 시작할 때의 마음을 잊어버립니다. 또한, 시작 할 때 처음 방향이 잘못 되어 내가 가고자 하던 길로 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시작을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1년의 처음은 정월 초하루라고 하고, 매월 처음은 초하루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경전 중에 ‘천지팔양경’ 이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천지팔양경’을 언제 읽습니까? ‘천지팔양경’을 읽어 본 사람 있습니까? 언제 읽죠? (이사 할 때 읽는다고 대답)

‘천지팔양경’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읽습니다. 집을 짓거나 이사를 하려고 하거나 이사를 갔거나 할 때 읽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 중에 가장 중요한 환경이 무엇입니까? 집이죠. 집.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합니다. 그래서 집 짓는 날도 받고, 이사한 날도 받지 않습니까? 여기서 이사 가는 날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저도 이사하는 날을 잡아주곤 하는데 언제 잡아 주는지 아십니까? 이사 날을 물으면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가장 바닥에 떨어졌을 때 이사를 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사업이 잘되거나 하는 일이 잘 될 때 이사를 갑니다. 또, 사업이 망했을 때 이사를 갑니다. 그렇죠?

잘될 때 이사하는 것은 내가 원해서 하는 거고, 망해서 가는 것은 원해서 가는 게 아니죠? 상승기류에 있을 때는 이사를 가지 말고, 하강 곡선을 그을 때 이사를 가라고 저는 말합니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에 이사를 가서 잘 될지 안 될지 걱정이 많습니다. 집에 대한 집착이 크다 보니까 이사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상승곡선을 탔는지 하강국면에 접어들었는가를 알기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재 나에 대해 잘 살펴야 되겠죠?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다.’ 는 뜻을 알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뜻을 알고 순응하게 되면 행복하게 됩니다. 불행의 시작은 순응이 아니라 역행을 할 때 옵니다.

보살이 원을 세우고 그 원을 이루기 위해 인욕하고 성취하는 길이라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그 보살도 다가오지 않은 것을 의심하면 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매 순간 순간 그 원을 버리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현재의 삶에 두려움 없이 갈 때 원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집착하지마라’고 했습니다. 무엇에 집착하지마라고 했는가?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중생은 자기 최면을 걸어서 자기 최면에 집착을 합니다. 그게 중생의 삶입니다.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보고 그 사물의 본질에 순응해서 흐트러짐 없는 삶을 살아야 부처님의 제자로 사는 겁니다. 그럼 왜 부처님은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시작과 끝을 이야기 하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나 존재방식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서 존재하는 거라 했습니다.

내 모습 내 삶의 현재 지위나 위치가 연기의 법칙에 의거해서 만들어 진 겁니다.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념즉시 무량겁’ 일념이 곧 무량겁 이라. 무량겁 또한 일념이라. 이 말이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이 한 생각이 무량겁이라는 건데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량하다는 겁니다.

부처님 당시 앙굴리마라 라는 부처님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부처님 제자가 되기 전에 하루에 100 사람을 죽여 1000개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면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다는 스승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다녔습니다. 99명을 죽인 뒤 마지막에 부처님을 만나 죽이려 달려들다가 부처님에게 죄를 뉘우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런 뒤에 부처님의 경지인 아라한에 오릅니다. 어떻게 그랬을까요?

이것이 ‘일념즉시 무량겁’과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왜 사람을 죽였는가?

백 명의 사람을 죽이고 나면 전지전능한 권능을 가진 존재가 될 거라는 사악한 믿음을 가진 존재 꾐에 빠져서 그랬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마구니의 꾐에 빠진 것이고 기독교적으로 이야기 하면 사탄의 꾐에 빠져서 원죄설과 비슷할 수 도 있겠죠.

앙굴리마라가 한 명 만 더 죽이면 무한한 권능을 가진 존재가 된다고 믿은 거죠. 그걸 믿고 사람을 죽이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마치 오늘 날 이 명박 정부가 오직 개발이라는 논리로 4대강 사업을 진행하는 것과 비슷한 거예요. 모든 환경이라는 것은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자연이 준 것입니다. 환경은 누구나 변화시켜야 합니다. 변화시켜야 하지만 올바로 변화시켜야 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의 존재는 무상하다. 무상한 이유는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생겨나고 변화하고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앙굴리마라가 살인을 하는 것은 연기의 법칙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깨뜨리는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앙굴리마라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신념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미 과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느끼기에는 똑같은 모습으로 느낄지언정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릅니다.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연기의 법칙은 어떤 법칙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존재방식은 우연이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연기의 법칙이기에 우연은 없습니다. 내가 연기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우연’이라는 자기 최면을 걸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연기의 법칙입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가지고 있고 내가 그럴 수밖에 없도록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동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연기의 법칙을 인연법이라고 합니다. 그렇죠?

연기법이라고도 하고 인연법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의 팔만 사천 경전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연기법을 설명하는 겁니다. 연기는 삶의 존재방식입니다. 삶의 존재방식을 설명한 겁니다. 삶의 존재 방식이 잘못 되었을 때는 고통이 옵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가 연기와 고입니다. 고는 연기의 도리에 순응하지 않고 연기의 법칙이 깨어진 삶을 사는 겁니다. 즉,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것처럼 자기 최면을 걸어서 거기에 집착해서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집착해서 빠져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채워질 수 없는 거죠. 현재의 삶을 열심히 살아야 되는데 과거에 빠져서 또는 미래에 매달려서 살면 되겠습니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연관성을 있습니다. 어제 이런 생각을 갖고 이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현재의 내 모습이 만들어 진거죠.

지금이라도 한 생각을 바꾸면 달라집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일념즉시 무량겁’ 이라 했습니다. 앙굴리마라처럼 ‘아 내가 잘못 했구나’ 하고 연기의 법칙을 믿으면 됩니다.

부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연기의 법칙을 믿는다는 얘기이고, 부처님 말씀을 믿는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권능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권능은 어떠한 것입니까?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해서 다 아는 분이라는 거죠. 부처님은 모든 길을 다 가봤던 분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은 길은 안내하는 안내문입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옳고 그름은 내가 선택할 문제이긴 하겠죠.

잘못된 믿음은 내 삶을 괴롭게 합니다. 나는 즐겁지만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이 즐겁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된 길입니다. 앙굴리마라는 사람을 죽이는 순간에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는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대답) 그 사람이 보살이라면 다르겠죠. 보살이라면 자신의 죽음으로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꿔주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문수스님이 소신공양을 했습니다. 소신공양을 했는데 그 분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4대강 사업을 중지하라. 둘째,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마지막으로는 부자중심의 정책에서 서민중심의 정책으로 전환하라’ 고 얘기했습니다.

저에게 국토부와 환경부 관련 공무원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찾아와 하는 말이 “4대강 사업을 완성하면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해질 겁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은 “이 사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것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 말에 동의 하나요? 동의하면 박수 한 번 쳐보세요. (묵묵부답) 박수를 안치니 동의하지 않는 겁니까? 그럼 동의하지 않으면 박수 한 번 쳐보세요.(박수)

저는 우리 신도님들이 특히 처사님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알면 살림을 살다 보니 이것저것 부탁을 하게 됩니다. 가능하면 무엇이든 자신의 신심이 우러나서 해야 한다고 봅니다. 불사든 시주든 본인의 신심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불자라면 어떻게 보시를 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돈이 많으니 돈 좀 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까 그런 말을 하면 저도 여러분과 같은 생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볼 때 4대강 사업이 중단될 수는 없다. 중단해서 복구한다면 그 복구비용은 얼마나 들겠나? 이 사업이 좋아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공정상 중단되기 어려우므로 어떻게든 더 잘해라’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4대강 사업이 경부고속도로 사업 당시와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박 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모든 사람들이 반대를 했지만 모든 사람들을 당신 편으로 삼으려고 당신들처럼 온갖 수단 부리지 않았다. 그 사람은 신념이 있어 신념대로 했을 뿐이다. 당신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모든 사람들을 동참시키려 여론을 호도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이 어찌 같으냐?

당신은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진행을 해라‘ 라고 말했습니다.

‘산과 강의 흐름과 줄기를 바꾸는 것은 국가의 근간을 바꾸는 사업이다.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사업인데 얼마나 고민을 하고 진행하였느냐? 4대강 사업의 결과는 당신들의 손자들이 본다.’ 이것은 50년, 100년 뒤에 결과가 나온다는 얘기죠?

잘못된 믿음,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나를 괴롭히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시작이라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합니다. 하루 일과는 하루하루 매일 진행이 됩니다.

아까 말한 천지팔양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시호일 이요, 일일호월 이고, 월월호년 이고, 년년호년 이면 내 평생이 즐겁다.’ 란 말이 있습니다. 시시는 처음시작을 말합니다. 하나가 시작되어 그것이 계속 돌아서 많은 변화를 준다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시작하느냐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느냐? 연기의 법칙에 근거해서 내가 새로운 시작을 하면 그 결과는 행복해지고 극락정토를 건설하는 원인이 됩니다. 연기의 법칙에 근거하지 못한 역행하고 어긋난 시작은 나도 불행해지고 내 주변에도 불행해 집니다.

여러분들은 연기란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연기란 말을 빼고 나면 답이 없습니다.

중생은 연기의 도리를 알지만 연기에 규합하고, 연기의 도리를 알고 연기에 규합하려는 삶은 보살의 삶이고, 수행자의 삶입니다. 연기를 알고 연기에 규합해서 사는 존재를 부처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연기를 알고 연기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삶.

삶이란 것은 생각과 행동이 매치된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생각과 행동이 연기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으면 행복해 집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재를 하는 것은 연기의 도리에 규합하기 위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자신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 잘못된 행동, 이런 행동들이 연기의 법칙에 규합하도록 만들어 가는 이 모든 것들이 수행입니다.

이 수행을 좀 더 철저히 열심히 하자는 것이 결재입니다. 결재라는 것은 시작을 말합니다. 결재를 하고 첫 번째 맞는 초하루라서 시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법회를 진행하였습니다. 모두 성불하시고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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