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스님 2010년 6월 초하루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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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454회 작성일 10-07-13 13:57본문
6월 초하루 주지스님 법문 (2010. 7. 12)
자 합장합시다.
반야바라밀 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합장 바로 하십시오.
오늘은 대한불교 조계종 산하 2500개 사찰에서 일제히 추모법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42일전에 4대강 살리기 사업 중단 촉구와 부정부패 척결 그리고 부자중심의 경제정책에서 서민 중심의 복지정책으로 그 정책의 주안점을 바꾸라는 말씀을 하고 문수스님께서 소신공양을 하였습니다.
문수스님의 참다운 보살정신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서 오늘부터 1주일간 추모기간으로 특별히 정했으며, 오늘은 조계종 산하 사찰에서 일제히 추모법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소중한 줄 아는데 사람 외의 생명이 소중한 지는 불자들 밖에 모릅니다.
이웃종교인 천주교에서 4대강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소속 교회들은 찬성하는 교회가 많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에 있는 교회들은 반대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나 개신교 쪽에서 반대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한 이 우주를 인간이 보존하고 잘 가꿀 생각은 하지 않고, 오만하게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질서를 바꾸려 한다고 해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불교에서는 어떤가요. 총무원에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교리는 서로 상생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그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갈등을 일으키면 그 갈등은 조정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야 된다는 것이 불교의 사회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총무원에서는 4대강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 스님 개개인들은 90% 이상이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왜 반대하느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그 생명의 본질은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내 생명이 존귀한 것만큼, 내 삶이 중요한 것만큼,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의 삶이 존중되어야 되고, 그 생명 또한 무한한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왜 그러냐? 부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서 생로병사를 공유하고, 유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전하는 연기의 법칙을 무시하거나 알지 못하고, 욕망으로 인한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나만이 존귀하고, 나의 삶만이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생명의 존귀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올바로 알고 연기의 법칙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면 생로병사의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다양한 요소들과 만나고 헤어집니다.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내 모양이 결정되고, 어떤 이미지로 만나느냐에 따라 심성이 결정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소중한 것입니다. 신을 믿는 이웃 종교에는 절대자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하는 것이 교리의 기본입니다. 불교 교리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은 원래 그대로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고유한 모습으로.
허공은 허공대로, 내가 인식을 하던 못 하던, 알던 모르던, 존재의 법칙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고 합니다.
어제 나와 오늘 내가 같습니까? 다릅니다. 분명하게 다릅니다. 비슷하죠. 비슷한데 한 생각을 바꾸면 180도로 완전히 달라집니다. 한 생각이 어떤 생각입니까? 연기의 법칙을 바로 알고, 연기의 법칙에 입각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수행은 연기의 법칙을 증명하는 겁니다. 내 존재를 알아가고, 이 세상의 질서를, 우주의 질서를 알아 가는 겁니다. 인간만이 아닌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삶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서로 공생하는 법을 잊은 것 같습니다. 소수의 영향력 있는 사람 보다 다수의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을 보듬어 안아서 그 사람들이 보다 더 자기 삶에 즐거움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현재 모든 정책들이 그렇지 못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수스님께서 그것을 질타하고 깨달을 자의 회향을 소신공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자살을 극도로 금하고 있습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내 삶을 포기하는 겁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불지종자를 끊는 것이라 했습니다.
즉, 부처될 씨앗을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고민을 하다가 사기꾼을 만났습니다. 그 사기꾼은 “내년에 많은 수확을 내려면 종자를 그냥 그대로 파종을 하면 되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기 위해 종자를 푹 쪄서 말린 뒤 뿌리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10배 이상의 수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농사를 짓지 않은 사람은 볍씨를 어떤 것을 파종해야 하는 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 모른다고 해서 질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원인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씨앗을 뿌린다고 해서 싹을 틔울 수는 없습니다.
모든 존재들은 부처가 될 성품, 씨앗을 갖고 있습니다. 즉, 원래 부처였다는 거죠. 원래 부처인데 부처인 줄 모르는 삶을 중생이라 하고, 원래 부처라는 자기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에 처음 오면 수행하는 법을 배웁니다.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부처님은 어떤 존재인가를 배우고,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이 나에게 어떤 삶의 희망을 주는가를 배웁니다.
또한, 그런 삶을 살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래서 선방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이 수행 아닌 것이 없다. 다만 연기의 도리를 아느냐 모르느냐.
연기의 도리를 아는 것을 정견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본질을 올바로 아는 것 이것을 정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많은 사람들이 이 명박 대통령이 짓는 농사는 싹을 건강하게 틔우는 것이 아니고, 어리석은 농부가 종자를 삶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문수스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 것입니다.
국토해양부 관계자가 저에게 와서 4대강 사업은 훌륭한 사업라고 하 길래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사업인 줄은 나는 모르겠다. 다만 생명 이야기는 차제하고라도 옛날부터 물길을 돌리는 것은 치수 즉, 관개치수라 하여 왕의 업적 중에 최고로 치었다. 관개라는 것은 물길을 내어 여러 사람에게 유익하게 쓰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근간을 흔드는 중요한 국책사업은 백년대계가 아니고 천년대계를 봐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여러분들은 몇 년간 치밀한 준비를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준비가 안됐다. 그런 상황에서 첫 삽을 뜨고, 우기가 오기 전에 빨리 사업을 종결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밤낮으로 포크레인으로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 맞느냐? 물론 공사를 시작했으니 장마가 오기 전에 최대한 공사를 하여 손실이 없도록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첫 삽을 뜨기 전에 얼마만한 준비를 하였느냐? 우리 국민 70% 이상이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첫 삽을 떴다고 이야기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은 이미 늑대 소년이 되었다.” 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문수스님입니다.
항간에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을 가지고 말들이 많습니다. 특히, 한기총 소속 목사들은 ‘그것이 무슨 공양이냐? 분신자살이지’ 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자살을 하지 못하게 한다.’ 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자살은 씨앗을 삶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명색이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우발적인가? 절대 우발적이 아닙니다. 그 분은 3년 동안 문 밖 출입을 삼간 채 하루 1종식을 하면서 수행을 하였습니다. 소신공양 3일 전 방안에 있던 그릇을 다 설거지 하고, 절의 총무스님께 더 이상 신문을 넣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주변을 정리하였습니다. 당일 오전 5시에 24시 마트에 가서 커피를 사서 본인도 한 잔 먹고, 주변에 청소하시는 분들에게도 한 잔씩 돌리고는 주유소로 가서 휘발유를 샀다고 합니다. 군위 강둑에 가서 겉옷과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두고, 유서를 써서 주머니에 넣은 뒤 소신을 하였습니다. 유서는 방안에도 한 장 적어놨습니다. 이것은 우발적인 분신이 아닙니다.
법화경에 보면 ‘일체중생희견보살’이라는 분이 “나의 몸을 불살라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걷어 내겠다.” 며 소신공양을 합니다. 이 소신공양의 불빛이 삼천 대천 세계를 비추어 모든 중생들에게 지혜의 씨앗을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은 여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공양이라는 것을 다시 살펴보면 몸으로 하는 신공양이 있고, 마음으로 하는 심공양이 있습니다. 신공양은 승가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물품을 불전에 올리는 것이고, 심공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서 남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보면 ‘금강경 사구계의 뜻을 내가 알고 이해해서 남에게 전해주는 공덕은 항하사만큼의 재산을 남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수승하다.’ 라고 했습니다.
불가에서는 스님들이 출가를 하면 연비를 합니다. 연비는 서원이라고 했습니다. 사미계 30계를 받으며 이것을 절대 범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위해서 연비를 합니다. 연비가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소지공양이라고 하는 손가락을 태우는 것입니다. 소지공양은 연비의 적극적인 방법이고, 소신공양은 깨달을 자가 자기의 하나 뿐인 육신마저 공양을 하는 겁니다. 육신의 덧없음을 알고, 육신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생로병사를 벗어나 해탈 열반의 참다운 길을 보여주는 것이 소신공양입니다. 소신공양은 희생이 아니고, 수행의 완성 자가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최상의 보시입니다.
종단에서는 문수스님의 49재를 기점으로 문수스님 소신공양 정신계승 선양회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의 정신을 2가지로 정리합니다. 하나는 우리 불자들에 대한 끝없는 자기 변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불자들의 신행활동은 자기 자신을 위한 불교 즉, 기복 불교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은 쉽게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끊임없이 “복을 빌지 말고, 복을 지어라. 작복을 해라.” 라고 말합니다. 작복을 해야만 그것이 내 재산이 되는 겁니다. 빌어서 쓰는 것은 언젠가는 갚아야 합니다. 복을 짓는 것은 베푸는 겁니다. 그런데도 베풀려고 하는 것 보다는 빌려고 하는 것이 많습니다. 절을 다니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야 합니다. 옷은 불자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불자다운 행동을 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잘못된 우리를 비판하고, 참다운 수행을 하라는 경책이 문수스님이 보여준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사회적으로는 참다운 복지국가 건설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국가는 복지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즉, 정의로운 사회는 복지 정책이 잘 된 사회입니다. 그 분이 유서에서 수좌답게 요점만 정확히 이야기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스님들은 내부의 승풍 진작을 위해 노력하고, 불자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배우고, 그것을 올곧게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롭다는 것은 남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남과 함께 하겠다는 생각이 정의로운 생각입니다. 수행으로 완성된 삶을 남과 함께 하겠다는 사회, 바로 정의로운 사회이며, 우리말로 하면 극락정토입니다. 이것을 사회학으로 얘기하면 복지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우리들의 서원이 굳건해 질수 있도록 합시다. 만약 서원을 세우지 못했다면 오늘 제가 말씀드린 것을 근간으로 해서 서원을 세워 보살로 새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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