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스님 11월 초하루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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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18회 작성일 16-11-29 16:04본문
오늘은 초하루입니다. 하루하루가 어찌 빨리 가는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사난득(四難得)이란 말이 있습니다. 네 가지 얻기 어려운 것을 말하는데 먼저, 인신난득(人身難得)으로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장부난득(丈夫難得)으로 사람으로 태어나도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불법난득(佛法難得)으로 남자의 몸을 받았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정법난득(正法難得)으로 불법을 만났어도 선지식을 만나 대각을 이루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난득입니다. 여러분들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인간으로 태어 난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중생들이 있지만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많은 부처님들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육도를 이야기 할 때 아래 세상은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하고 위 세상은 인간, 아수라와 천상을 말합니다. 이 중에서 인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축생세계 밑으로 태어난 중생들은 악업을 소멸시키느라 바빠서 자신이 처한 환경을 바꿀 여유가 없습니다. 주어진 대로 먹고 주어진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반대로 천상에 있는 사람들은 복을 까먹고 있다고 합니다. 소비 만 하는 거죠.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복을 짓기도 하고 까먹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인 여러분들은 축생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무수한 축생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살다보면 축생과 같습니다. 우리는 인간과 축생의 다른 점을 알아야 합니다. 축생은 네 발로 다니고 날아다니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김새도 다르지만 가장 다른 점은 축생은 오감으로 만 살아갑니다. 우리 인간은 오감과 뜻으로 살아갑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축생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항상 미래를 예측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축생과 달리 오감과 의지로 살아가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항상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 어떻게 하면 아미타 세계에 태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미륵부처님이 계시는 도솔천에 태어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너무 오감에 의지해서 살면 탐욕에 빠지게 됩니다. 오감에 빠져 살면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끼리끼리 살게 됩니다. 축생과 비슷한 생을 사는 것입니다. 잘못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현생에서 급속도록 복을 까먹으며 삽니다. 인간의 존엄은 예측하는 힘과 남을 위해 사는 행동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인문학이 홀대받고 있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철학을 배우려 해도 취직이 되지 않는다고 과를 통합하고 없애서 배울 수가 없습니다. 철학이 없는 나라는 정체성도 주체성을 가질 수 없고 문학도 발달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은 인과 연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팩트(fact)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철학에서도 1, 2, 3 ,4 .....를 진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의 진리는 무아입니다. 자신이 수행을 통해 자신이 무아임을 확실히 알았을 때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수행을 위해서는 먼저 참회를 하고 참회를 한 뒤에는 하심을 하여 아만(자만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참된 진리는 무아를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일이고 존귀한 일인 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시간부터 참된 불교를 배워야 합니다. 인연의 법칙, 인과의 법칙을 항상 관찰하고 관찰하여 무아를 만들고 무아를 만들어 이 세상 어느 것하고도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무정삼매’에 들었다고 하고, 원각경에서는 ‘여환삼매’에 들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모두 인간 이상의 삶을 살 수 있겠죠? 인간의 이상의 삶은 오감에 집착하지 않고 오감을 다스리는 삶입니다. 이를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들에게는 ‘보시’를 강조하셨고 수행자에게는 ‘인욕’을 강조하셨습니다. 참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을 생각하고 자신의 것을 내 놓을 때 ‘나’란 아상을 지울 수 있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수행하여 절대 무아의 세계에 들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금강’이라고 합니다. 누구도 깰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깰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수행하여 금강의 자리에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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