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스님 8월 칠석기도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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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등사 댓글 0건 조회 3,258회 작성일 18-09-19 08:39본문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은 칠석(七夕)입니다. 철석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견우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을까요? 견우는 소를 끄는 사람 또는 소를 모는 사람 이였습니다.
그럼 직녀는 어떤 일을 하였나요? 선녀의 옷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북방 민족들은 먹고 취하는 것,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 칠월 칠석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와 같은 나라에는 칠월 칠석과 같은 날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또는 견우와 직녀와 같은 일이 있을까요?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당시 그곳은 먹고 사는데 있어서 궁핍함이 없었습니다.
눈을 뜨면 과일이 열려 있어 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또 옷은 어땠을까요? 날씨 때문에 많이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 견우와 직녀 같은 일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북방에 사는 민족들은 늘 그런 것들이 걱정이 여서 이런 문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럼 칠월 칠석이라는 것은 부처님 법에 의하면 어떤 것 일까요? "인연"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났다 인연 따라 사라진다.
그래서 칠석에 무병장수를 기원 합니다.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장수 합니다.
아무리 잘 먹어도 추우면 죽습니다. 또 아무리 따뜻하게 해도 먹을 것이 없으면 죽습니다.
견우가 소를 끌고(몰고) 밭을 갈아서 우리 먹을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백중은 칠월 칠석날이 중요한 날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바라보면서..
삶을 살아가는 힘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것 같지요?
오늘도 잘살기 위해서 이곳 사찰에 오셨다고 봅니다. 잘살고 부자로 살고 그렇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런 삶에 힘만큼 강한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잘 안합니다.
옛날에 내가 어떻게 죽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 어떻게 하면 피해없이 죽을까? 생각해 보신 분 있으시지요?
생각해 보면 연세가 들어서 하는 것과 젊었을 때 생각해 보는 것이 조금 다르실 겁니다.
그리고 불교를 믿어서 그렇게 생각해 보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종교는 죽음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기에 죽음에 대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불교를 믿어도 사성제 가운데 도성제. 팔정도(八正道)의
즉, 정견(正見 바른 견해).정사유(正思惟 바른 사유).정어(正語 바른 말).정업(正業 바른 행위).정명(正命 바른 생활).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정념(正念 바른 마음챙김).정정(正定 바른 선정)을 하지 않으면, 안 좋은 곳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만큼 힘이 강한 것이 죽음이다.
또 여기에 계신분들은 삶보다 죽음을 더 많이 생각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고 적적한 것이 참 좋은 것 인데
살다 보면 이것이 제일 괴로운 것으로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던지 고독함 쓸쓸함 외로움 적막함을 벗어 날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더 괴로운 것입니다.
부처님의 눈은 감은 듯 만듯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삶과 죽음사이에 가만히 있어서 그렇습니다.
명상을 할 때 눈을 뜨면 어떻습니까? 명상이 잘 안됩니다. 반드시 우리 마음은 밖으로 향합니다.
또 눈을 감으면 어떻습니까? 잠이 옵니다.
그런데 눈을 감은 듯 말듯 하면 참 괴롭습니다.
왜 그럴까요? 좀더 감으면 잠이 오고, 조금 더 뜨면 번뇌가 일어나서, 저도 수행 중에 그것이 제일 하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좋은데, 눈을 감은 듯 말듯 하는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면 1시간 또는 3시간을 못 있습니다. 물론 똑바로 뜨고 집중을 하고 화두를 잡으면 있을 수 있지요. 그래야 번뇌가 일어난 것도 알고, 눈동자만 돌려도 공부를 많이 하다 보면 번뇌가 일어난 것을 압니다.
모든 움직임은 번뇌입니다. 집중이 깨지는 것, 고요함이 깨지는 것 입니다.
만약 머리카락이 날리면 어떻습니까? 집중이 깨져 있는데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날리면 감각이 같습니다. 그러면 집중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늘 죽음을 생각해야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진실해 집니다.
살려고만 한다면 생각을 하면 어떨까요?
사기를 치게 됩니다. 잘살려고 만 한다고 생각 하면 분명히 구4(口四:말로 짓는 4가지 악업) 업을 짓게 됩니다.
망어(兩舌:거짓말),기여(兩舌:진실이 없는 꾸민 말), 양설(兩舌:이간질하는 말), 악구(兩舌:괴롭히는 말,성나게 하는 말,욕설)의 죄를 짖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진실하게 우리가 진실하게 살수가 있는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며,
외롭고 쓸쓸함을 생각하고 적막함이 정말 즐거우면서 적적요요본자연 (寂寂寥寥本自然)이라는 말처럼 적막함을 정말로 즐기는 사람은 해탈한 도인입니다.
정말 적막함이 좋은 건데 적막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적막함을 정말로 싫어합니다.
잘때도 울고, 깨어 날때도 울고 ,엄마 없으면 찾고
그래서 우리는 불자로서 또 수행자로서 또 미래의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늘 고요하고 쓸쓸하고 적막함을 즐길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부러울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모두 부러운 것 입니다.
여기 계시분들은 거의 다 남을 위해서 삶을 살고 계십니다.
자기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왜 그러실까요?
적막하고 쓸쓸하고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의식 하게 되어있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칠월 칠석날을 위해서 전등사 불자님들은 가족적으로는 무병장수를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늘 자기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쓸쓸함을 생각하고 외로움을 생각하고 적적요요본자연 (寂寂寥寥本自然) 그런 즐거움이 일어나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법문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칠석(七夕)입니다. 철석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견우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을까요? 견우는 소를 끄는 사람 또는 소를 모는 사람 이였습니다.
그럼 직녀는 어떤 일을 하였나요? 선녀의 옷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북방 민족들은 먹고 취하는 것,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 칠월 칠석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와 같은 나라에는 칠월 칠석과 같은 날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또는 견우와 직녀와 같은 일이 있을까요?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당시 그곳은 먹고 사는데 있어서 궁핍함이 없었습니다.
눈을 뜨면 과일이 열려 있어 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또 옷은 어땠을까요? 날씨 때문에 많이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 견우와 직녀 같은 일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북방에 사는 민족들은 늘 그런 것들이 걱정이 여서 이런 문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럼 칠월 칠석이라는 것은 부처님 법에 의하면 어떤 것 일까요? "인연"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났다 인연 따라 사라진다.
그래서 칠석에 무병장수를 기원 합니다.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장수 합니다.
아무리 잘 먹어도 추우면 죽습니다. 또 아무리 따뜻하게 해도 먹을 것이 없으면 죽습니다.
견우가 소를 끌고(몰고) 밭을 갈아서 우리 먹을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백중은 칠월 칠석날이 중요한 날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바라보면서..
삶을 살아가는 힘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것 같지요?
오늘도 잘살기 위해서 이곳 사찰에 오셨다고 봅니다. 잘살고 부자로 살고 그렇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런 삶에 힘만큼 강한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잘 안합니다.
옛날에 내가 어떻게 죽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 어떻게 하면 피해없이 죽을까? 생각해 보신 분 있으시지요?
생각해 보면 연세가 들어서 하는 것과 젊었을 때 생각해 보는 것이 조금 다르실 겁니다.
그리고 불교를 믿어서 그렇게 생각해 보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종교는 죽음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기에 죽음에 대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불교를 믿어도 사성제 가운데 도성제. 팔정도(八正道)의
즉, 정견(正見 바른 견해).정사유(正思惟 바른 사유).정어(正語 바른 말).정업(正業 바른 행위).정명(正命 바른 생활).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정념(正念 바른 마음챙김).정정(正定 바른 선정)을 하지 않으면, 안 좋은 곳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만큼 힘이 강한 것이 죽음이다.
또 여기에 계신분들은 삶보다 죽음을 더 많이 생각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고 적적한 것이 참 좋은 것 인데
살다 보면 이것이 제일 괴로운 것으로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던지 고독함 쓸쓸함 외로움 적막함을 벗어 날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더 괴로운 것입니다.
부처님의 눈은 감은 듯 만듯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삶과 죽음사이에 가만히 있어서 그렇습니다.
명상을 할 때 눈을 뜨면 어떻습니까? 명상이 잘 안됩니다. 반드시 우리 마음은 밖으로 향합니다.
또 눈을 감으면 어떻습니까? 잠이 옵니다.
그런데 눈을 감은 듯 말듯 하면 참 괴롭습니다.
왜 그럴까요? 좀더 감으면 잠이 오고, 조금 더 뜨면 번뇌가 일어나서, 저도 수행 중에 그것이 제일 하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좋은데, 눈을 감은 듯 말듯 하는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면 1시간 또는 3시간을 못 있습니다. 물론 똑바로 뜨고 집중을 하고 화두를 잡으면 있을 수 있지요. 그래야 번뇌가 일어난 것도 알고, 눈동자만 돌려도 공부를 많이 하다 보면 번뇌가 일어난 것을 압니다.
모든 움직임은 번뇌입니다. 집중이 깨지는 것, 고요함이 깨지는 것 입니다.
만약 머리카락이 날리면 어떻습니까? 집중이 깨져 있는데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날리면 감각이 같습니다. 그러면 집중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늘 죽음을 생각해야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진실해 집니다.
살려고만 한다면 생각을 하면 어떨까요?
사기를 치게 됩니다. 잘살려고 만 한다고 생각 하면 분명히 구4(口四:말로 짓는 4가지 악업) 업을 짓게 됩니다.
망어(兩舌:거짓말),기여(兩舌:진실이 없는 꾸민 말), 양설(兩舌:이간질하는 말), 악구(兩舌:괴롭히는 말,성나게 하는 말,욕설)의 죄를 짖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진실하게 우리가 진실하게 살수가 있는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며,
외롭고 쓸쓸함을 생각하고 적막함이 정말 즐거우면서 적적요요본자연 (寂寂寥寥本自然)이라는 말처럼 적막함을 정말로 즐기는 사람은 해탈한 도인입니다.
정말 적막함이 좋은 건데 적막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적막함을 정말로 싫어합니다.
잘때도 울고, 깨어 날때도 울고 ,엄마 없으면 찾고
그래서 우리는 불자로서 또 수행자로서 또 미래의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늘 고요하고 쓸쓸하고 적막함을 즐길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부러울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모두 부러운 것 입니다.
여기 계시분들은 거의 다 남을 위해서 삶을 살고 계십니다.
자기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왜 그러실까요?
적막하고 쓸쓸하고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의식 하게 되어있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칠월 칠석날을 위해서 전등사 불자님들은 가족적으로는 무병장수를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늘 자기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쓸쓸함을 생각하고 외로움을 생각하고 적적요요본자연 (寂寂寥寥本自然) 그런 즐거움이 일어나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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